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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May 30. 2024

E31. 끝내는 말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 버렸네. (I’ve cast my heavy burdens on Canaan’s happy shore, I’m living where the healing waters flow;)‘ (한영찬송가 221장, 1절 첫 줄)      

 필자가 초신자일 때 이 찬송가를 따라 부르면서, '가난 복지'의 복지를 복지(福祉)로 이해한 적이 있다.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의 복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구나! 그 뒤에 영어로 된 가사를 보고 ‘가난’이 가나안의 준말임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의 교리를 공부하게 되면서 복지가 한자로 표기하면 복지(福地) 임을 알게 되었다. 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전통적으로 풍수지리설 등의 영향으로 땅에 민감한 우리 조상님들의 기호에 맞는 가사 번역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찬송을 자주 부르면서, 영어 가사로 첫 줄 끝에 있는 말이 한글 찬송에 여러 번 반복되고 후렴의 중심 구절임을 알게 되었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가나안 땅이 무엇인가? 출애굽기 3장 8절에 보면, 광야에 도피하고 있는 모세에게 여호와가 사명을 주면서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등의 지방에 이르려하노라.’ 즉 이스라엘 족속을 이집트에서 집단으로 가나안 땅으로 옮기겠다는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리더로 모세가 지명되는 것이다. 여기서 목적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릇 모든 프로젝트는 목표를 과장하고 미화한다. 이 표현은 땅의 비옥성이나 생산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그동안 해석하였다. 그 말이 사막의 유목민들이나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먹을 음식이 풍부한 땅을 묘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이스라엘의 실제 지리적인 상황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일 년 중 절반 이상이 고온 건조한 자연환경과 그 당시에는 개발의 조건마저도 그 가능성이 희박한 땅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의 주변 지역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있지만, 대부분 사막 내지는 준사막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스라엘 백성이 중심 무대로 삼았던 산간지방은 대부분 바위로 뒤덮여 있는 척박한 지역이다 보니,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이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복지는 어디에 있을까? 과거에는 기름진 땅이었으나 험난한 역사를 겪으면서 본래의 아름다움은 파괴되고 지금은 황폐한 현실이 되었나? 성경 신명기(Deuteronomy) 8장 7~8절에서 가나안 땅을 좋게 표현하고 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렇지 않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噴泉)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For the LORD your God is bringing you into a good land - a land with streams and pools of water, with springs flowing in the valleys and hills; a land with wheat and barley, vines and fig trees, pomegranates, olive oil and honey.)

     

 가나안 땅에 대한 이해와 혼동은 판단의 기준 곧 비교의 기준을 잘못 잡은 데에 있다. 가나안의 참모습과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지대에서 40년간 노숙 생활하였던 상황에서 그들을 인도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보아야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에서 젖이란 목축을 지적하고 꿀은 농경을 의미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보낸 열두 명의 정탐꾼이 포도, 무화과, 석류로 세 종류의 과일을 가져왔을 때, 그 과일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증거로 생각하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가나안 땅의 비옥성을 과장한 것이라기보다 그 땅에서 생산의 가능성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완벽한 조화를 누릴 수 있는 땅이었다. 그러한 조화로운 삶은 에덴에서 발원하여 네 방향으로 흐르는 풍부한 물 근원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풍부한 수원과 강의 이미지는 영적인 의미를 갖는데, 에덴동산에서 누리는 완벽한 조화와 풍요로운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창세기 3장에서 보듯이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단절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가 단절되고, 에덴 땅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우리 인간은 서로 싸우며 우리 맘대로 살았다. 그 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여 인류 구속사를 향한 부름이 시작되었다. 가나안 땅이 가뭄으로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어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로 집단 이주하였고 몇백 년 뒤에 이집트를 집단으로 탈출한 그들이 고생 끝에 가나안땅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를 보면 히브리인들은 페르시아나 로마의 압제를 경험하고 노예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예수가 메시아로 와서 인류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지만,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은 다시 가나안땅에서 추방되어 전 세계에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신세가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십자군 운동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등 변화가 보였지만, 우리 인간의 역사는 중세의 암흑기로 접어들고 가나안 일대는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다. 그동안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기존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교리를 재해석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 인간의 지성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이루며 오늘날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유대인들은 불리한 여건에서도 그들의 말과 문자와 문화를 지키며 현재까지 살아남아 현재 그 땅에 나라를 재건하였다. 현재 그 지역은 새로 진출한 유대인과 그 땅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아랍계 주민과의 갈등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고 세계적인 갈등으로까지 비화될 소지가 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이 말이야말로 기독교의 교리를 집약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종교개혁을 처음으로 주창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중심 구절을 표현하면 이렇다. ‘Ich bin der Weg, die Wahrheit und das Leben.’ 독일어로 길과 진리와 생명은 각각 남성, 여성, 중성 명사로 공평하게 나뉘어 있네.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천국에 이르는 길이요, 이것이 바로 진리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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