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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우 Feb 04. 2023

혼자 일어설 수 있을까


번아웃이었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비유 삼아, 지난 학기가 끝날 무렵 불에 타버렸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돌아보니 그것을 영어로 옮기면 그만인 번아웃이었던 거다. 당시  상태를 고려하지 못하고 종강 전부터 학원을 등록하는 패기를 부렸다. 결과는  봐도 뻔하지. 좋지 않은 상태가 이어지는 동안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고 학원비 칠십만 원이 공중분해되고 있었다. 부모와 매일 통화로 안부를 물으면서, 학원엘 다녀왔다거나 오늘은 수업이 없었다고 거짓말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어젠 결국 부모에게 내가 겪는 근원적인 어려움을 실토하며 울어 버렸다. ‘학원 안 갔어 잉잉’을 한 건 아니고, 따지자면 정신과 의사에게 서비스 비용을 지불하고 해야 하는 말을 가까운 사람에게 울컥 뱉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는 통화였다. 묵묵히 듣던 부모는 다 내려놓고 잠시 여행을 다녀오라고 조언했다. 그러겠다 하고- 감사 인사를 하며 끊었다.





오늘 수강 연기를 신청하러 학원에 오랜만에 갔다. 싸인까지 하고 연기 접수를 마쳤는데, 데스크 직원에게 다시 전화가 오더니 학원 서점에 돈을 내러 가라는 거다. 연달아 두 달을 듣기로 한 것 중 반절만 딱 한 달 연기하겠다는데, 받았던 교재 네 권에 대한 돈을 지불해야 했다. 외에도 수강 연기에 따른 여러 불이익들이 있었는데 사전에 대체 설명해주질 않은 것들이었다. 홧김에 수강 연기를 취소하고 나와, 카페에서 오후 내내 공부를 했다. 밀린 숙제와 강의가 태산이었으나 난 각성된 상태였다.


초등학교 방학 때 학습지 같은 걸 하다가 여섯 달치가 밀린 적이 있다. 그걸 방학 이주만에 해치웠었다. 부모는 그만 밀린 것들을 버리고 새로 오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했으나 난 오기를 부리며 밥 먹고 자고 싸는 시간 외에 학습지만 풀었다. 내가 오늘 오후에 경험한 것이 그런 상태의 각성이었다. 타성에 가까워진 자기 실망과 아직은 남아 있는 자기 신의. 그 앙상블이 내게 폭발적인 엔진이 되는 것은 유년시절부터의 모티브였다.





오늘  카페 마감 전까지 전투적으로 단어를 외우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신 미약에서 벗어날  있었던 이유엔 학원의 괘씸한 태도도 있었으나  계기는 부모와의 통화였기에  달라진 상황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가족 간엔 이만한 상담 서비스 비용이 없다.


부모는 말했다. “그래, 넌 엄마가 약이야.”


나는 그 말에, 너무 이래서도 안 된다고, 부축받아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리면 나중에 당신이 없어지고 나서 나 혼자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푸념했다. 내겐 철푸덕 넘어져도 혼자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맷집이 하루빨리 필요했다. 결국은 나 혼자 남을 테고,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 평소 부모 말에 고분고분한 딸도 아니지만, 내겐 이런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언제 고아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부모의 대답은 이러했다. “네게 엄마가 필요 없어질 때 엄마가 없어지는 거야.”





내게 거는 주문, 혹은 기도처럼



엄마가 없어지는 건 네게 엄마가 필요 없어지는 때야. 엄마 없이도 잘해나갈 수 있으니까 엄마가 없어지는 거야. 엄마가 없어져도 잘해나갈 수 있어 그땐. 다 그래.




딸의 두려움을 간파한 부모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다가, 기분이 이상해져 인사하고 서둘러 끊었다. 한 친구로부터 “딸에게 엄마가 필요 없어지는 때는 없을 거야.”라는 절망적인 말을 들은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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