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창 위로 마우스 커서가 깜빡거린다.
도대체 그동안 글을 어떻게 쓴거야.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에 놓여진 다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카페인도 내성이 생기는지 한모금 마실 때 뇌 끄트머리까지 관통하던 짜릿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게 충전이란 진하게 내린 커피 한모금에서부터 시작됐는데 머그컵 가득 채운 액체를 남김없이 털어넣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정도다. 모든 사물과 감정에게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글도 예외는 아니었다. 분명 쓰고싶었던 건 많은데 막상 활자나 문장으로 만들어가려니 손가락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문장 쓰고 다시 지우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보면 나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날 정도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따위의 궁상을 떨며 모든 것이 왜그리도 버겁게 느껴지는지 시발점을 찾기위해 몸을 뒤로 젖힌 채 두 눈을 감아본다.
나를 구성한 모든 것들 중 가장 수고스러운 것이 눈(目)일 것이다. 보아야할 게 너무 많은 세상을 욕심부려 한 장면도 놓치지않고 담아보겠다는 집념 하에 안구는 쉴새없이 굴러다니고 매말라간다. 나의 안구건조증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어쩌면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보상이랍시고 플라스틱 포장 안에 들어있는 몇방울의 눈물을 떨어트려주면 각막에서부터 퍼져나가는 시원함에 다시 온 세상을 보기위해 열렬히 굴러다닌다. 이제는 그 인위적인 시원함 마저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속눈썹이 가지런히 내려앉으면 어렵지 않게 암흑을 방문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찾아갈 수 있는 이 암흑은 때때로 나를 꿈으로 데려간다. 그 세계에서는 하고싶은대로 살았다. 그래서일까 어느날은 현실보다 꿈이 더 행복한 때가 있어 깨지않고 몽유에 잔뜩 취하길 바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깨고 싶지 않아’ 라고 느끼는 순간 때 맞춰 울려펴지는 현실의 파열음에 두 눈이 떠진다. 내가 있을 곳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듯 말이다. 꿈에서 나는 현실에서 채울 수 없는 것을 끌어안으려 한 것 같다. 수려한 날개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는 것, 어린시절 함께한 만화 속 주인공을 만나보는 것, 마음에 둔 누군가를 꿈에 불러 유치한 사랑놀이를 즐긴 것, 사랑받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던 타인의 눈빛을 더듬어본 것. 이 모든 것이 내가 잠에 들어야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눈을 뜨면 닥쳐올 모든 일들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고 나는 자꾸만 수면을 갈망했다. 나의 모든 욕구는 비로소 그 세계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할 일을 잔뜩 미뤄놓은 채 밤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작은 방에 어둠이 짙게 깔리고나서야 눈을 꼭 감았다. 오늘도 꿈 속의 나는 자유로울 것이다. 늘 그랬듯 한 마리의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겠지. 내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 손을 잡고 온기를 나눌 수도 있다. 때론 못이룬 소망으로 나를 갈아입고 상상하던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역시 오늘도 깨고싶지 않은 꿈을 꿀 것이다.
그러나 꿈은 악몽으로 변질되기 쉽다. 정신차리니 손은 붉다 못해 새카만 피로 물들어 있다. 내 세상인 듯 하늘을 가로지르던 나는 순식간에 쫓기는 위치가 되어 낯선 이에게 발목을 붙잡혀 당장 그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공포에 뒤덮인채 턱 끝까지 기어오른 서늘한 칼끝은 보기좋게 나를 찔러댔고 현실과 혼동할 만큼의 고통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이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보통은 두 눈을 세게 감았다 뜨면 꿈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괴로워하고 있고 낯선 이는 한번 더 칼날을 휘두르려 매섭게 다가온다. 그제서야 꿈에 갇혔음을 깨닫는다. 내 멋대로 들어오고 떠나던 세계가 균열이라도 일어난듯 좀처럼 현실로 보내주지 않았다. 영영 이 곳에 갇히게 될까 생각지도 못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몇 번째인지 횟수조차 셀 수 없을 만큼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자유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 안을 뒤덮은 공기가 뒷 목이 저릿할만큼 서느렇다. 어둠에 적응하면 익숙하던 촉각이 느껴진다. 덮고 있던 이불의 바스락거림, 이마에 손을 얹자 손가락 틈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칼 따위가 현실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증명한다. 현실임을 자각하자 통증이 퍼졌던 부분이 뻐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악몽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피투성이채로 망가지지 않더라도 나의 시나리오대로 열렬한 사랑을 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떠나버리거나, 내게 올 것이라 확신하고 문을 열었을 때 바라던 이의 부재를 맞이하기도 했다. 내가 오롯한 유희를 만끽 할 수 있는 도피처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안다. 현실이 버겁다고 꿈으로 도망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걸 말이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현실보다 행복하면 그건 좋은 꿈이 아니라고 한다. 현실이 더 행복해야 진정 좋은 꿈이라는 것. 더 이상 욕심을 내지않고 잠에 든다. 이제는 아무것도 펼쳐지지 않는 검은 꿈이여도 괜찮다.
암흑에서 벗어나자 여전히 마우스 커서가 깜빡 거리고 있다. 여전히 눈은 건조했지만 문장을 적기에는 충분하다. 다 식은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가운 머그컵에 온기가 채워지고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하얀 창 위로 마우스 커서가 깜빡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