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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26. 2024

갈 길이 멀다

공복투쟁 D+12.


금요일이 왔다. 어제는 간헐적 단식 11일 만에 가장 큰 핀치 -이제까지와 비교도 안될 만큼 배고프고 집중도 안됨- 를 맞이했으나 손바닥에 소금을 털어 할짝이며 버텨냈다. 전날 저녁, 입맛이 없다고 삶은 계란만 먹었기 때문일까. 위를 비우는 것도 좋지만 다음 날 내 몸이 통상운전은 할 수 있을 정도의 연료는 넣어 놓아야겠다 다짐했다.


이제 겨우 12일째지만 오늘의 공복투쟁은 어제와 비교하면 아주 수월한 편이었다. 아침 일찍 시청과 은행에 다녀오느라 나의 배고픔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한 스프레이로 목부터 허리까지 꼼꼼하게 코팅하고, 전날 얼려둔 보리차 한병, 손수건 두장, 손풍기에 양산도 쓰고 나갔는데도 은행에 도착하니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만 피폐하고 다른 사람들은 물기하나 없이 보송보송하더라! 긴팔을 입고 마스크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차로 오셨구나. 부럽습니다. 


아침부터 부산을 떤 것은 내일 비자가 끊기는 건 때문이었다. 시청 직원은 2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안 나왔냐며 같이 울상을 지어주더니 마이넘버카드의 유효기간을 2개월 (*비자 기간갱신 심사 중에 비자가 먼저 끊기면 이후 2개월은 일본에 머무를 수 있는 특례기간이 주어진다. 그래서 이것도 2개월인 듯) 늘려주었고, 은행에서는 내 상황에 공감은 해주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며 비자를 갱신한 뒤 다시 오란다.


"그때까지 계좌 사용에는 문제가 없나요?"

"새로운 비자 기간을 확인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 계좌 입출금이 중지될 수 있습니다."

"언제 비자가 나올지 모르는데. 사용중지가 되는 건 언제쯤일까요?"

"곤란하시죠. 죄송합니다. 하루 이틀 지났다고 바로 딱 끊기는 건 아니에요. 언제쯤 그렇게 된다는 건 죄송하지만 저희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갱신하신 다음 가능한 한 빨리 오세요."


알았다 하고 돌아왔지기분은 좋지 않다어제 상담챗으로 문의했더니 지점에 문의하라더니, 지점에서는 기한 지나도 되니까 갱신하고 오란다. 은행 본사에서 온 우편 안내문에는 비자 기한만료 전에 꼭 오라고 쓰여 있었다. 모두가 우리 소관이 아닌 것이다. 인터넷 상담직원은 권한이 없으니 지점으로 넘기고, 지점에서는 비자 기한을 확인하는 게 일이니 다 끝난 뒤 오라 하고, 우편 안내문 보내는 본사 부서는 편지 보내는 게 일이다.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 연계도, 상상도, 고객재산권과 행사 보호에 대한 고민도 없다.


만약 '비자 갱신 심사보다 현 비자기한이 먼저 끝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하는 상상이나, '오늘 지점 창구에 이런 문의가 있었다'라는 공유가 진작부터 있었더라면 은행의 대응 시스템은 조금 달랐을 것이다. 적어도 우편 안내문에 주의표 붙여서 ※갱신 심사 중인 분은 갱신 후 3 영업일 이내에 오십시오. 이 한마디라도 붙어있었겠지. 이제까지 쭉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불편이 오늘도 이렇게 나 한 사람의 불편으로 끝나버리고 만 것이 씁쓸하다. 하기사 다른 은행은 온라인으로 제출하게 하는 걸 굳이 점포로 출두하라고 하는 은행에 이런 걸 바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갈 길이 멀다. 한참 멀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길, 땀이 나인지 내가 땀인지 모르는 상태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를 열어 녹두부터 확인했다. 우렁각시라도 와주지 않는 한 녹색 녹두가 노랗게 되어있을 리는 없는데, 그래도 열어보게 된다. 녹두는 여전히 말없이 찬물에 누워있을 뿐이다.


또다시 간헐적 폭식이 예상되는 불금, 오늘 저녁 메뉴는  돼지고기와 숙주나물을 넣은 녹두전이다. 요즘 녹두전의 고소하고 바삭한 그 맛이 자꾸 생각 큰맘 먹고 녹두를 사봤다. 엄마가 부치는 걸 먹기했는데 잘할 있으려나,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상하다. 엄마가 녹두전 때 녹두는 노란색이었는데 여기 녹두는 녹색이네. 에콰도르산이그런가? 그래도 녹두(緑豆)가 녹색(緑色)인 당연하잖아, 이걸로 해도 문제없을 거야- 하던 녹두를 어제 물에 담그고 나서야 알았다. 녹색은 녹두 껍데기고 녹두전할 이걸 까야한다는 것, 한국에서는 깐 녹두를 따로 판다는 것, 엄마는 깐 녹두를 사다 해왔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 물에 분 녹두를 살살 문지르니 껍데기가 벗겨졌다. 손바닥으로 비벼도 봤는데 요령이 나쁜 건지 한 알 한 알 하는 게 더 확실하고 빠르다. 녹두 500그램 중 한 70알 정도 깐 것 같은데 70알은 몇 그램일까?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아침 먹는 것도 잊은 채 은행 욕을 하다 보니 2시 반이 되었다. 밥부터 먹고 나면 부지런히 녹두를 까야지. 자칫하다간 녹두전은커녕, 부부 둘이 나란히 앉아 녹두 까기 인형이 되어야 한다. 추억은 방울방울 쌓이겠지만 배는 좀 많이 고플 것이다. 


휘유, 오늘도 긴 하루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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