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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ug 30. 2024

멜라닌 색소를 팔아 쓰는 글

태풍 10호 산산이 일본 큐슈에 상륙하고 관동지역에도 어젯밤부터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덕분에 어항에 들어있는 금붕어 체험 중. 뻐끔뻐끔. 아가미가 없어 숨만 막히는 아침 8시, 습도는 98%.


기분 전환 삼아 아침부터 가위를 들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했지만 뭘 모르는 생짜 초보라서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름 재미와 달성감을 느끼지만 마지못해 하는 부분도 있다. 미용실 가기가 부끄러워서다.


거울을 보며 자를 수 있는 부분은 괜찮다. 문제는 뒷머리. 손으로 더듬어 본 '감각'과 아까 자르지 않은 곳 같은 '느낌'으로 자르고 있으니 층이 가지런할 리가 없다. 나름 '감각'과 '느낌'을 살려 자르고 있으니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컷'이라 우기고 있는데 엄마가 보고 거지커트냐고 물었다. 거지는 맞는데 거지커트는 아니야.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컷이야.


엄마 눈에도 삐뚤빼뚤해 보이는데 미용실에선 어떻게 보이겠는가. 아직 미용실에 다니던 시절, 호기심에 옆머리를 셀프로 잘라봤다가 미용사가 딱 그 부분을 들어 올려 '이거 왜 이래요?'라고 물었다. 손님 머리보고 이거라니. 기분은 별로였지만 제가 잘랐다가 실수로, 라고 대답했더니 코웃음을 치고 막 자르면 안 된다고 혼이 났다. 내 머리 내가 자르다 망친 거로 왜 처음 보는 미용사한테 혼을...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왠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네, 네... 그렇군요...'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하고 거긴 두 번 다시 가지 않지만, 그때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지금이라 더더욱 미용실에 갈 수가 없다.


길이로는 더 자를 것도 없지만 숱이 많아 두피에 땀이 찬다. 숱을 좀 줄여야지. 욕실 창가에 거울을 세워두고 가위질을 시작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흰머리가 섞여있다. 그게 눈에 보일 때마다 아직도 심장이 서늘하다.


서른 중반 이후로 흰머리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많진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감모율 15%짜리 숱가위질에도 심심찮게 붙어 나오고 머리를 감을 때 자연탈락된 흰머리가 손가락에 걸려 나오기도 한다.


최근 2년 사이에 부쩍 늘었다. 나는 남편에게 '네가 알게 모르게 속을 썩여서'라고 하는데, 그는 내게 '브런치 탓'이라고 한다. 흰머리가 늘어난 시기가 브런치 활동기간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매일 뭘 쓴다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거라고. 그럴 때가 되어서 나는 흰머리겠지만 남편의 추측은 꽤 마음에 든다. 그 가설 대로라면 나는 연금술사가 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의 멜라닌 색소를 활자로 만드는. 젊음을 파는 것 치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비루한 글이지만 머리카락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안한다.


조만간 염색을 다시 해야겠다. 미용실은 갈 수 없으니 집에서. 나이를 더 먹으면 흰머리가 덜 신경 쓰일까. 민낯으로는 돌아다닐 수 있지만 바람결 따라 보였다 말았다 하는 흰머리밭은 아직 남의 눈에 띌까 조심스럽다. 누구에게나 오는 공평한 늙음이지만 늙어감이 성장 카테고리 안에 들어있던 삶을 노화로 시프트 체인지 하는 데에도 머뭇거림이 따른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갔을 때 처음 키오스크로 호두과자를 살 때도 그랬다. 정신이 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린 남자아이돌이 더 이상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엄마는 내가 열광하던 에이치오티가 하나도 멋있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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