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람 Nov 01. 2024

2600엔으로 영화관을 전세 낼 수 있을까

오늘은 11월 1일. 나는 내 인생의 몇몇 11월 1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2006년 11월 1일, 집에 가는 광역버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한참을 흘끗거리다가 '머리카락이 참 예쁘네요' 라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투나 행동으로 보아 아픈 사람이 분명했지만 어쨌든 타인에게 갑자기 쓰다듬어지는 것은 불쾌한 일이고 혹시라도 집까지 따라올까 봐 다른 정류소에서 내려 오들오들 떨며 돌아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부터 11월 1일이 특별한(?) 날이 되었다. 한동안은 '작년엔 그랬는데 올해는 이렇군' 하며 매해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두 개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2017년 11월 1일은 방에 전등을 켜두고 출근해 집에 와서 혼자 깜짝 놀란 날. 하지만 2024년 11월 1일은 꽤 오래도록 기억 남는 날이 될 것이다. 오늘은 영화 파묘를 보러 간다.




한창 파묘가 돌풍을 일으키던 올 3월인가, 일본 어디 회사가 판권을 구매해 일본에서도 곧 개봉될 거란 소문이 있었다. 개봉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기다리다가 끓어오르는 호기심에 져 결국 줄거리를 읽어버리고 말았다. 오, 이건 꼭 봐야 해, 스크린으로 봐야 해. 국민학생 때 좋아하던 퇴마록 같은 느낌도 나고 항일 소재가 들어있는 것 역시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개봉은 감감무소식인 채 불만 더 지펴졌다. 


기왕이면 남편과 함께 보고 싶었다. 묫자리나 지관, 무당처럼 외국인이 쉽게 접할 수는 없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가 일본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궁금했고, 한국인의 삶에 알게 모르게 녹아있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접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정확히 '뭐가 좋을 것'이냐 한다면 K-드라마 볼 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늘어나면 나도 편하고 남편도 장면 하나하나 더 알차게 즐길 수 있다 말고는 별다른 이점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남편은 한국에서 영화 명량의 이순신 장군과 김고은 배우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자 흥미를 보였다. 혹시나 하여 '일본인 입장에선 어쩌면 약간 불편할 수도 있다'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사람은 일본을 약간 불편해하는 사람(바로 나예요)이미 같이 살기까지 하고 있는데. 


10월 18일, 드디어 일본에서도 파묘가 개봉되었다. 한참 전부터 설레발을 떤 것 치고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이주가 넘도록 보러 가지 못했다. 이러다간 막 내리겠다며 부랴부랴 영화관 예매 페이지에 들어가니 딱 오늘부터 스케줄이 변경되었다. 퇴근 후에 가기 좋은 시간대로. 게다가 매달 1일은 영화 관람료가 저렴해지는 서비스 데이. 한 사람당 관람료는 2000엔인데 1300엔에 볼 수 있다. 운이 좋다.  



예매는 이틀 전에 했지만 여전히 우리뿐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별 고민도 않고 중앙 한가운데 자리를 골랐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록 파묘는 우리 외에 아무도 예매하지 않는다. 다른 날보다 관람료도 싼데. 우리에게 좋았던 저녁 시간이 다른 이들에겐 오히려 슈퍼 안 끌림의 시간이었던 걸까. 아니면 볼 사람은 이미 다 본 것일까. 다들 현장 구매를 하나. 괜한 걱정이 이어지다 문득 생각했다.


잘하면 전세 낸 것 같겠는데?


남들보다 훨씬 늦게 보는 영화인데 영화 이외의 것으로도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둘만 있다고 앞 좌석에 발을 올려놓거나 할 생각은 아니지만, 단돈 2600엔으로 100명 들어가는 상영관 하나 전세 낸 기분으로 오컬트 영화를 즐길 수 있다니,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한번 닿은 생각은 간절한 소망이 되어갔다. 하나님, 영화관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게 해 주세요. 어느 순간부터 나는 몇 시간에 한 번씩 예매 상황을 확인해 '아직 아무도 없음!'이라고 남편 라인에 시시때때로 보고했고, 남편은 역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무섭다고 했다.


"집에 올 때까지 절대 감상 말하지 말고 맥주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꼭!"


맥주는 이미 어제부터 냉장고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는 영화 자체도 흥미롭지만, 일본인인 남편이 파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역시 그와 비견하게 기대되는 부분이다. 아마 반일이 어쩌고 하는 일은 없을 것이지만 인상적인 씬과 복선 눈치챘냐는 이야기들을 하고 난 뒤엔 자연스럽게 왜 아직까지 한국의 콘텐츠에서 일제강점기가 소재가 되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술과 역사, 정치, 그리고 K-콘텐츠는 언제나 우리에게 즐겁고 뜨거운 토론의 밤을 선사해 주었다. 여기에 좀처럼 해볼 수 없는 상영관 전세까지 더해진다면 어떠하겠는가. 이것까지 포함해, 나는 오늘 있을 파묘의 밤이 기대된다. 


지금 이 시간까지 우리 외의 예매자는 없다.

영화 상영까지 남은 시간은 6시간. 자, 나는 오늘 2024년 11월 1일을 '2600엔으로 영화관 전세 내고 파묘 본 날'로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선거소 문 앞까지만 다녀온 일본 중의원 선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