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영화적 삽질
??? : 돈 워리, 광주. 베스트 드라이버. 레츠 고 광주.
그녀와의 강원도 여행을 말아먹고 몇 달 뒤, 생애 첫 전라남도를 방문했다. 단순히 영화감독 형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찾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 감독 형은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부모님의 권유 탓이었을까.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이 양반은 결국 의대생이 됐다. 이 같은 이유로 형에게 장난스레 ‘한국의 조지 밀러’라고 부르곤 했다. 그는 레지던트로 일하면서 한 옥탑방에서 살고 있었다.
내 고향 대구만큼은 아니어도, 남부지방 특성상 뙤약볕 아래 꽤나 푹푹 찌는 날씨가 이어졌다. 이른바 ‘강원도 사건’ 이후 그녀는 이 양반을 싫어하게 됐고, 나도 괜히 감독 형한테 원망이 들어 연락을 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이후 감독 형이 내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내용이 괜찮다고 판단해 이것을 영상으로 재편해보자고 제안했다. 고심 끝에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방식으로 티켓을 끊었다. 굳은 결의가 무색해진 3일째, 나는 인천으로 도주했다.
영화와 영상은 철저한 감독의 예술… 그런데 누가 감독인데?
감독 형의 레지던트 일정으로 영화 분석 영상은 오후 늦게부터 촬영할 수 있었다. 홀로 캠퍼스를 산책하거나, 공원 일대를 거닐며 촬영할 영상과 관련해 상념에 잠겼다. 감독 형이 퇴근한 뒤, 촬영장으로 향하는데 도착한 곳이 아주 가관이었다. 지하철역 점포 가운데 무슨 청년 공간 같은 곳이 있었는데, 스튜디오라고 하기에는 차마 민망한, 촬영 장소로 아주 개차반인 곳이었다.
분명 내려오기 전에는 최적의 플레이스를 섭외했다고 했는데, 이 양반한테 또 낚였다. 조명은 간헐적으로 점멸하다 중심을 되찾길 반복하고, 공간은 굉장히 협소해 장비 둘 곳을 찾기 힘들어 어지러이 놓인 기기들로 숨 쉴 틈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대여한 카메라도 성능이 매우 후져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말로는 영화 비평계의 대변혁을 일으키자면서 최소한의 구색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무너지는 멘털을 부여잡고 감독 형의 의사를 존중해 두 인물이 미디움 샷으로 나와 영화 분석을 이어가는 것으로 컨셉을 잡았는데, 이 양반이 망치려고 작정했나 보다. 어눌한 발음은 기본으로 깔면서 도저히 자연스러운 연기를 소화하지 못해 내가 디렉션을 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결국 한 명만 카메라에 담기는 것으로 합의했지만, 구도 때문에 또다시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갈등은 양상을 바꿔가며 지속됐다.
(아무리 당신이 예술가라도 이건 아니다. 한계다.)
이틀간 영상은 채 15분 찍었나? 다음 날에도 전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불렀나 하는 원망만 쌓여갔다. 셋째 날 레지던트 출근 전에 비로소 감독 형은 사과의 의미인지 뭔지 몰라도, 찍어왔던 새로운 단편들을 보여줬다.
전혀 눈에 들어오질 않았고, 나보다 훨씬 무책임하게 말만 앞선 사람이 세상에 더 있다는 사실에 짜증이 밀려왔다. 형이 옥탑방에서 나간 이후 희망이 없다고 판단, 인천으로 돌아갈 결심을 내렸다.
약 3년 만에 이메일… 단편 영화 상영회를 연다고?
작년 초,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감독 형한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간 전화번호가 바뀌었나 보다. 그렇게 잊고 살다가 25살 친구와의 만남과 비슷한 시기인 이번 달에 이메일로 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민기야 00형이다.’ (이메일 제목)
여전한 말투. 그 양반이었다. 예전에 내 명함을 받은 기억이 나서 그 당시 이메일을 구글링해 내게 연락이 닿았다고 설명했다. 올해 어느 영화제에 출품을 했는데 상영이 됐고, 그것을 계기로 영화제 관계자들과 개인 상영회를 연다는 것이다.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해 약 30분간 대화했다. 감독 형은 10편이 조금 못 되는 단편을 찍었는데, 한 편당 100-200자 정도 소개글을 부탁한다고 했다. 글쟁이가 나 밖에 없다나 뭐라나. 또 짧은 분량으로 자기 단편 세계관에 대해 정리해달라고 하는데, 이 부분은 철저히 내 창작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감독 형의 세계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부디 이번에는 야반도주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