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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기 Dec 24. 2022

장기평균으로의 회귀

유나바머와 살인마 잭의 오두막


오두막이라는 뒤틀린 미래가 현재로 침투하다


주식과 비트코인 차트 분석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하이먼-민스키 모델. 정확한 매수매도 시점은 누구도 알 수 없으나 장기적 관점을 제시할 때 사용되는 유명한 예시다.


상승세에선 ‘새로운 논리’가 탄생한다. 누구나 장밋빛 로맨스를 꿈꾸며 환희에 찬 미래를 설계한다. 성공한 이들의 자만심을 눌러주고, 낙심한 자들의 침울함에 용기를 북돋아준다는 지혜의 왕 솔로몬의 경구인 ‘이 또한 지나가리라’도 행복회로에 불타는 망상적 미래 앞에선 무용하다. 그러다 주먹으로 면상을 한 방 쳐맞고 육체와 정신이 짓이겨져보면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인마 잭의 집>에서 주인공은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해변가에 오두막을 짓다 철거하길 반복한다.

아름다움은 단 한 순간만 존재하고 영원하지 않다는 미학적 특성을 지녔음에도, 인간은 그것이 무한할 것이라는 헛된 믿음으로 살아간다. ‘현실부정’에서 ‘좌절’까지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데다, 시간마저 더디 흐른다.


평범함이라는 현재 완료형 시제가 과거 분사로


솔직히 이런 결말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의식적으로 감지해왔다. 철학적 숙명론이 아닌 하이먼-민스키 모델로 대표되는 느슨한 운명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을 대략 유추한 바 있다. <살인마 잭의 집>의 주인공처럼 공상 속 해변에 오두막을 지을 것인지, ‘테러리스트’ 유나바머처럼 숲 속에 오두막을 올릴 것인지. 어느 장소인지 알 수 없으나 개인적 공간을 축조해 그 곳에서 스스로 결박한 상태로 홀로 남아 예술 하는 삶. 대학교 입학할 때부터 이 같은 ‘죽음충동’은 무의식의 표층에 잔류하고 있었다.


유나바머와 그의 오두막

장막으로 덮고 자물쇠로 봉인한다면 숨길 수 있을 줄 알았다. 남들처럼 직장을 다니고, 이성과 만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전부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이 같은 가면무도회를 지속한다면 정신적 병약함과 나약함이 해소되리라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평범한 일이 누구에겐 먼 나라 이야기다. 사회를 구성하는 97%의 정상 범주와 2%의 비정상들. 극소수 인간들은 전부 범죄자거나 예술가거나 아니면 두 개 조건을 모두 만족한 이들이다. 나머지 1%는 이 세계에 속해 있다고 판단하기 힘든 광인들이거나 자살한 사람들이다.


간혹 자신이 1-2%에 해당한다는 특권의식을 갖은 자도 있다. 소위 힙스터나 예술가병에 걸린 이들인데, 있는 힘껏 두들겨패주고 싶은 작자들이다. 이것은 명백한 저주다.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외딴 곳에 오두막을 지은 채 고독을 씹길 희망하는 자는 없다.


이성적 판단으로 누가 이런 미친 짓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며 생을 살아가겠나. 그저 평범한 삶을 꾸려가고픈 소박한 욕망 뿐이다. 그런데 무의식과 운명이 나를 철학자나 예술가로, 은둔한 신학자로 만든다.


직장에 다니고,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미래를 약속할 , 야성의 부름에서 멀어진 것으로 착각했다. 자연의 야멸찬 외침이 종식된  알았다. 그러나 단지 외면했을  절대로 벗어날  없는 운명임을 체감했다. 야만으로의 이끌림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발목을 잡고 나를 존재의 오두막으로 불러들인다.


기를 쓰고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노력은 늘상 억압받고 좌절된다. 시지프가 끌고가는 바위처럼, 프로메테우스를 쪼는 새처럼 자유를 예속한다.  신적 존재와 운명은 내가 예술과 철학-신학을 하지 않으면 최대한의 고통을 선사한다. 이제는 살기 위해 가혹한 운명을 웃으며 긍정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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