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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망지 Sep 04. 2024

<멜랑콜리아>,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다큐 기법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서곡과 우아한 희곡


영화 <멜랑콜리아>




지극히 재미없어 보이는 제목을 선정해 놓고 나는 가만히 다시 그 영화를 속으로 음미해 본다. 혼자 영화관에서 보는 몇 안 되는 영화들, 그중에 하나가 오늘의 멜랑콜리아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대로 압도당해서 엔딩크레딧이 끝내 올라가기 전까지 엉덩이를 내 힘으로 못 떼는 경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소, 발끝까지 전율이 일고는 이윽고 요상하게 눈물이 고이고 말더라. 슬픈 감정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공포감이 잔뜩 일었다. 세상 영화로 느낄 수 있을 온갖 강렬한 경험들을 다 그 영화관 의자에 앉아 느끼고 있었다. 



우울할 때 보면 더 우울해지는 영화라고 친구가 귀띔을 해주었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보는 내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당장이라도 다른 행성이 지구로 달려오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일 지구가 망한다면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을 정도로 태평한 사람은 되지 못할 것 같다. 어린 시절 꽤 긴 시간을 지구종말론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보낸 사람에게 멜랑콜리아에 나온 멜랑콜리아의 충돌은 다시 그 트라우마를 안겨주기에 적합한 주제였다. 나 혼자만의 죽음이 아닌 행성의 죽음. 전 인류의 종말. 나는 마지막 생존자이자 지구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함께 사라질 소멸자가 되는 것이다. 이보다 무서울 경험이 있을까.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저스틴과 클레어 그리고 레오 뒤로 멜랑콜리아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하얗게 빛으로 다가왔을 때, 그 베토벤 교향곡 9번, 클래식의 굉음과 함께 나는 온몸의 소름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의 마지막 밤은 Green Day의 Last Night on Earth처럼 차분하고 낭만적일 수가 없었다. 



희망을 가지면 기대를 하게 되고 기대를 하게 되면 그 희망을 잃을 수 있다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이게 된다. 2부에서의 저스틴은 그 누구보다 태평하게 종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와 "느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막상 당연한 죽음이 가까워지니 저스틴은 더 이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부에서 그렇게도 모든 것에 불안해 보였던 그녀인데. 저스틴에게 두려웠던 건 죽음보다도 삶이었나 보다. 저스틴과 클레어. 두 자매는 각각 삶과 죽음을 무서워했다. 죽고 싶지 않은 것 과 살고 싶지 않은 것. 무엇이 더 절실하고, 무엇이 더 공포스러운 감정일까. 



Sometimes I hate you so much


영화의 1부와 2부에서 클레어는 저스틴에게 저 말을 한다. 같은 사람이 하는 같은 대사지만 두 사람의 심적인 위치는 완전히 달랐다. 1부의 클레어는 저스틴에게 지겨워하며 저 말을 한다. 심연의 우울증으로 주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은 저스틴에게 클레어는 너를 어디까지 봐줘야 하냐는 뉘앙스로 네가 '싫다'말을 한다.


2부의 클레어는 오히려 더 저자세가 되어버린다. 모든 걸 통달한 동생에게,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그럼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걸 받아들여버린 동생에게 제발 내가 품고 있는 의구심이, 이 공포감이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달라며 질문을 반복하지만, 저스틴은 클레어가 원하는 안도감의 답변을 주지 않는다. 저스틴은 현실을 직시하며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는 말만 늘어놓는다. 그때 클레어는 저스틴에게 또다시 네가 '싫다'는 말을 한다. 듣고 싶은 희망을 주지 않았기에.



삶이 당연할 땐 저스틴의 기력이 풀이 죽어 있었고, 클레어는 생기가 넘쳤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올 때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기력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엔 클레어가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저스틴이 되기도 한다. 죽도록 살고 싶다가도 죽도록 죽고 싶다가도. 죽음이 무언가에 끝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그걸 매번 강도의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양 극단을 바라는 마음은 결국 한 점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마치 두 자매가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싫다고 쏘아붙이기도 했지만,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충돌해 오는 멜랑콜리아를 등에 지고 서로를 부둥켜안아줬던 것처럼. 



삶이 버겁고 무거워 축축 늘어졌던 저스틴도,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고 싶어 죽음을 끝없이 부정하고 싶던 클레어도, 각자의 열망으로 삶과 죽음에 열심히 보이콧을 해보아도 시간이 흐를수록 멜랑콜리아는 지구를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우리가 죽음을 갈구하던, 삶을 갈구하던, 유한한 끝은 쉬지 않고 제 차례를 맞추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가장 태연한 척, 충돌에 대한 염려가 없는 것처럼 굴던 클레어의 남편은, 결국 멜랑콜리아가 지구로 다가오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지한 순간, 독약을 선점하고 죽음을 제 손으로 가져왔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약간 섞여있었겠지만,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해왔던 그야말로 누구보다도 죽음이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천문학 덕후라던 사람이 막상 행성 충돌의 실재화가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에서 조금 의아했다. 다신 볼 수 없을 행성충돌이라는 희귀한 경험을 왜 보지 않고 죽는 걸 택했을까. 막상 끝없이 불안해하고 불안정해했던 클레어가 끝에서 두 눈으로 그 충돌을 지켜봤다는 점에서 그녀가 태연한 척하던 그보다 더 강인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사실 앞부분의 오프닝시퀀스만 따로 떼어서 보아도 탈이 없다. 격정적으로 흘러나오는 베토벤 교향곡 9번과 함께 있는 힘껏 환상적인 미장센의 장면들은 시작부터 이 영화를 판타지의 세계로 인도해놓고 있다. 초현실주의 작품 같기도 한 각각의 움직이는 씬들은 후반부의 행성충돌 및 지구 멸망을 어떻게 환상적으로 더 그려줄까를 기대하게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맨 마지막 시퀀스에서 오히려 영화의 끝은 허무할 정도로 짧고 굵게 끝내버린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한순간엔 저스틴이 되어 스토리 전개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몸을 맡기며 보다가도 다시금 클레어가 되어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과연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을 진짜 하게 되는 걸까 하는 희망과 기대를 섞은 의구심을 잔뜩 가지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는 계속 흔들리고 있다. 두 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없던 것처럼. 흔들리는 시선들과 끝없이 그들의 심신을 따라 흔들리는 핸드헬드의 카메라기법. 그런 점에서 마치 실제 지구 종말의 마지막 날의 다큐멘터리를 엿보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멜랑콜리아의 충돌이라는 소재부터가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아름다운 비극 같으면서, 그 안에서 삶과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두 주인공의 내면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고 있자니, 가장 극 같은 이야기가 가장 다큐멘터리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인조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클레어와 저스틴 같았다. 지구 종말이 다가온다면 쉽게 볼 수 있을 두 표상의 인물 같았기에, 이는 다큐멘터리로 찍어낸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라는 진부하고 단편적인 제목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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