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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터 바른 토스트 Dec 30. 2023

뜻하지 않은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백수비망록 EP. 01] :: 나는 백수로소이다


It's easy to feel like you're not in control of your life. that's because you're not.  
you can't stop things happening. you just have to deal with them when they do.

내 인생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기분이 자주 들어요. 실제로 그러니까.
벌어지는 일을 막을 수가 없어요. 터질 때마다 감당해야 하죠.

[The end of the f *** ing world 2, Alyssa]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랬다. 나는 특정한 목표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호승심이나 만용을 갖고 퇴사하지 않았다. 월급이 밀려, 현생을 살기 벅찼기에 퇴사를 선택했다. 시원섭섭한 마음을 뒤로하고 내 앞길만 생각하자는 포부와 다짐은 금세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쪼글쪼글해졌다. 마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사고 당시에는 특별한 외상이 없다가 뒤늦게 후유증이 발생한 느낌이랄까.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와 함께 원치 않은 퇴사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적지 않은 두통과 함께 입술에 바이러스성 수포가 터져 며칠간 꽤나 고생을 했다.


 

나는 '잠재적 장기 백수'가 되었다. 백수로 올해를 마무리하고, 백수로 2024년 새해를 시작한다. 원치 않은 시기에 자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유로 새롭게 달린 백수라는 타이틀은 굉장히 곤욕스럽다. '괜찮다, 이참에 좀 쉬어라.' 하는 말들은 따뜻하기는커녕 무언의 압박감, 부담감과 함께 명치 끝 부분을 지그시 누르는 아릿한 통증을 느끼게 한다. 무수한 자기 계발 서적이나 유튜브나 브런치, TV 프로그램 등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무언가를 하나 이룬, 목표한 것을 달성한' 20~30대 청년들의 모습들은 경이로움과 함께 한 편으로는 모호한 심리적 통증이 느껴진다. 이게 바로 '열등감'이겠다.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잠재적 장기백수.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뒤로 물러난, 잠시 멈춰 선 자리에서의 비망록을 남기는 것도 썩 괜찮겠다 싶어 브런치를 열었다.




    

생애 첫 실업급여 신청


사직서와 이직확인서에 찍힌 코드 번호 12번. 임금체불로 인한 자진퇴사 내역을 확인한 후, 나는 곧장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 근처 고용노동센터에 방문했다. 실업급여 신청 절차를 잘 정리해 둔 여러 블로거들 덕분에, 사전에 필요한 절차들을 미리 완수한 후 필수 서류들을 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용센터 내부는 전날 내린 눈이 얼어붙은 길거리만큼이나 아찔한 한기가 느껴졌다. 수급자격 신청서를 작성한 후, 내가 뽑은 번호를 부르는 창구로 갔다. 코드 번호 12번의 경우 담당 직원이 달라서인지, 30분을 더 기다린 후에야 상담을 진행할 수 있었다.




'충분히 수급 가능하실 것 같아요. 필요한 서류를 엄청 잘 준비해 오셨네요. 미처 준비하지 못하셔서 두 번씩 다녀가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밝은 목소리로 나를 응대해 주시는 분의 칭찬 아닌 칭찬에 멋쩍은 웃음이 났다. 좋지 않은 이유로 생애 첫 실업 급여를 신청하러 온 상황에서 맞닥뜨린 칭찬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5개월 정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겠다는 예상과 다르게, 장기수급자로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대부분 상기되어 있거나 굳은 표정으로 답답함에 언성을 높여가며 상담을 하는 주변 환경과는 달리, 나는 대기시간 보다 더 빠르게 웃으며 상담을 마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어려움 없이 실업급여 신청을 마쳤다. 신청일로부터 2주 뒤인 다음 주에는 새해맞이와 함께 1차 실업인정일에 맞춰 또 한 번 센터를 방문해야 한다. 그리고, 퇴사 일로부터 2주가 지난 오늘까지 연체된 급여와 퇴직금은 아무 소식이 없다. 당장 목돈이 필요하기에, 간이대지급금을 받기 위해서는 노동부에 임금체불 진정을 넣어야 한다.


내년이 시작됨과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꽤나 즐비해있다. 맘편히 즐기는 휴가나 여행으로 웃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했다면 참 좋으련만.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그렇기에 인생이 재미있는 것이라지만 삐딱하게 어긋나며 발생하는 이벤트들은 꽤나 마음을 쓰리게 한다.





내심 실업급여를 수령하는 기간이 길지 않았으면 한다. 잠재적 장기 백수가 아닌,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 일상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단기적으로는 원대한 목표를 적어 쫓아가기보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한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떤 것에 눈을 떼지 않을 수 있는지. 악을 쓰며 가랑이를 찢기보다, 천천히 걸어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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