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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터 바른 토스트 Jan 08. 2024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백수의 일상

[백수비망록 EP. 02] :: 사업주님이 로그아웃하셨습니다

'4, 3, 2, 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댕댕거리는 종소리와 서울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소음과 화려함을 스마트폰을 통해 소음과 화려함을 간접경험하며 새해를 맞이했다. 딱히 별 감정도 들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밤낮이 뒤바뀌어 부쩍 건조해진 눈을 비벼대기에 바빴다. 작년 12월 29일은 임금체불 회사에서 퇴사한 지 딱 2주째가 되는 날이었다. 회사에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즉, 4개월 반 가량 밀린 임금도 퇴사 후 2주 안에 입금되어야 할 퇴직금도 처리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밀린 임금과 퇴직금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언제쯤 제 돈을 주실 수 있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부 인사와 함께 내 돈을 내놓으라는 독촉 메시지라니. 장문의 메시지를 작성하다 문득 내가 작성한 문장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당연한 권리주장이며, 언젠간 해야 할 필수적인 연락이었지만 굳이 이 연락을 이 시점에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 다신 보지 않을 듯 으르렁거리며 싸우다 원수진 상황도 아닌 데다, 그들의 안녕을 바라는 입장이었기에 그랬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감정을 수틀리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없이 머뭇거리며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고심하던 메시지를 삭제해 버렸다. 




1차 실업급여 받으러 왔습니다


종이에 적힌 1차 실업인정일 날짜에 맞춰 지역 고용노동센터에 방문했다. 1월 첫 주임에도 불구하고 센터 안은 사람들이 즐비했다. 20~30대 청년층부터 중장년층까지 여러 연령대가 뒤섞여 집체교육을 듣기 위해 강의실 앞에 모였다. 급하게 입장하지 않아도 되는 것임에도 사람들은 무언의 경쟁을 하며 줄을 섰다. 


나는 장기수급자로, 앞으로 210일 간 실업급여를 받게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차수 별로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 숙지했다. 정해진 일자에 실업급여를 신청해야 하는 절차가 있어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경각심과 함께 서둘러 재취업을 하는 것이 나은지, 재취업을 조금 미루고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나을지 다시 한 번 고민이 드는 시간이었다. 1시간 동안의 집체교육을 마친 후 간만의 외출과 야외활동에 피곤함을 느꼈다. 다음 날 1차 실업급여가 입금되었다는 알림톡을 받았다. 소액이긴 하지만, 한 달치 월세와 관리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잠시 안도감이 들었다. 





고용노동부 임금체불 진정을 넣었다. 그런데,


퇴사 전, 나는 퇴직금은 차치하고 밀린 임금으로 인해 발생한 생활고를 간이대지급금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간이대지급금을 받기 위해선 고용노동부 진정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작년 12월 31일 나는 2023년의 마지막 날을 고용노동부 임금체불 진정을 넣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사업주 정보와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기입하고, 관련 서류를 제출한 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받을 수 있을까..' 확신 없는 혼잣말만 읊조릴 뿐이었다.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은지 얼마 되지 않아 사건 조사를 위한 출석요구 안내가 담긴 알림톡이 도착했다. 회사 주소와 가까운 강남지청에 방문해야 했다. 관련 서류는 진정을 넣을 때 착실하게 알집으로 고이 묶어 보냈던 터라 방문 시 필요한 것은 신분증 말고는 없었다. 서울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진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2023년 1월 8일 월요일 오후 2시. 부랴부랴 시간을 맞춰 도착한 장소에는 근로감독관님들이 정신없이 업무를 하고 계셨다.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구에 서서 쭈뼛대며 '안녕하세요.'를 읊조렸다. 딱히 누군가 안내를 하지도, 인사를 받아주는 이도 없었다. 파티션에 붙은 개인명패를 훑으며 담당감독관님을 찾아갔다. 10분 일찍 도착한 나에게 대표님이 오시면 정시에 시작하겠다는 말과 함께 간단한 질의를 진행했다.




약속된 2시가 지났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어떻게 인사를 건넬지 고심하던 것이 무색하게 임금체불 회사와 관련된 그 어느 누구도 출석하지 않았다. 대표님은 연락이 닿지 않으셨고, 급여를 담당하던 인사 팀장님은 퇴사를 하셨단다. 예상치 못한 퇴사 소식에 놀랐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공통된 상황으로 인해 금세 이해가 되며 마음이 진정됐다. 담당 근로감독관은 임의로 작성한 체불된 임금과 퇴직금을 세전으로 정정해 주시며 구두로 전달해 주셨다. 세전이긴 하지만, 내가 계산한 것보다 높게 책정된 금액에 나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간이대지급금을 제외하고 나머지 돈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 끝까지 받을 수 있는지 조차 모르면서 말이다. 


끝끝내 회사와 관련된 그 어느 누구도 만나 뵙지 못했고, 일방적인 나의 답변만 가득한 조서만 확인한 채 고용노동부 조사는 마무리되었다. 상대방의 확인과 인정이 필요하기에, 앞으로 2~3주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회사 측에서 별도의 반론 없이 체불된 임금과 퇴직금에 대해 인정을 한다면, 체불 임금 등 사업주 확인서를 등기로 받아 이후 간이대지급금 신청과 함께 민사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고 했다.


시뻘겋게 지장을 찍고, 상대방을 형사처벌하지 않겠다는 처벌불원서에 사인을 하며 제발 내 돈을 올해 안에 받을 수 있길 마음속 깊이 바랐다. 생각보다 불안하거나, 짜증이 올라오진 않았다. 뭔가 홀가분 한 마음이 앞섰다. 또 하나 처리했다, 그런 마음. 대표님을 만나 뵈었다면, 그의 사업이 성공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었을 것이다. 그러나 퇴사 시점부터 로그아웃하신 대표님을 끝까지 만나볼 수 없었다는 것에 큰 실망감이 들었다. 






늦은 새벽에 잠이 들고, 늦은 오후에 눈을 뜨고 게으른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텅 빈 머릿속과 오르내림이 없는 감정. 무(無)로 인해 생겨난 여유로움에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백수생활도 꽤나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막함 보다 편안함이 앞서있다. '언젠간 다시 일할 수 있겠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함께 한 켠에는 어마무시한 공포감이 밀립해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상을 보내게 될까? 어떤 마음과 감정으로 나에게 주워진 여유를 채워나가게 될까? 나의 백수생활이 공허함과 허무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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