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시간관념 점검
왜요?
시간이 없어서요... 안녕히 계세요 저는 이만...
내가 남달리 회사를 박차고 나온 것은 '시간'때문이었다. 얼마가 남았는지 모를 시간을 내가 원하는 생각과 방향으로 살아내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거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던 24시간을 내 손안에 넣었는데 왜 나는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을까?
퇴사 전엔 근무 시간, 출퇴근 시간, 퇴근해도 회사 생각하는 시간 등은 모두 내 것이 아닌 시간으로 생각했었다. 대략 7할 정도의 시간을 그렇게 나는 버린 자식 취급했고 그 나머지의 짧은 시간을 애지중지하며 그것만이 내 삶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퇴근 후 작고 소중한 시간이 못내 아쉬웠고 24시간이 내가 온전히 누릴 시간으로 채워진다면 나는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퇴사를 결정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바라던 차고 넘치는 시간의 벼락부자가 되었는데 나는 왜 시간을 잘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시간에 대한 나의 인식이 나를 짓누르는 것을 보고 나는 스스로 시간에 대한 관념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게 되었다.
물론 매일 아침 출근하는 규칙적인 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의지가 약한 나는 쉽게 게을러질 것을 알고 있다. 온전히 쉬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멍 때리고 쉬는 시간조차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무의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생각의 양이 아니라 생각의 질이다.
시간을 잘 쓰는 것은 생각을 잘하는 것이다. 비록 몸은 내가 원하지 않는 활동을 하고 있어도 좋은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내 시간이 된다. 회사 일을 하면서도 현실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생각해 낸 것이 생각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수동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생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먼저는 나무가 홀로 자라듯 성장하고 성숙하고 새싹이 자라듯 향기가 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삶과 비교 우위에 서고자 궁리하는 것은 나를 더 피폐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뇐다. 주변에 땅 사고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해야 할 생각은 나의 못남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축복해 주는 것이다.
또한 평온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진취적이어야 한다. 산너머 혹은 바다 건너 어딘가의 지향점이나 기준이 있어야 일관된 생각을 할 수 있다. 삶의 의미, 기준, 방향을 잡고 항해하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목적지는 희미하여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자신만의 철학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정한다면 그 기준에 따라 일관성 있게 움직이고 하루를 살 수 있다.
퇴사 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나 기준까지도 잠시 놓아 버리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관리하는 스킬이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목욕물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지는 않았는지, 조급한 마음과 하릴없이 채용공고를 뒤적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나의 생각과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뇌어 본다. 백수의 시간은 왜 더 빨리 가는가?
문제는 알아차리면 반은 해결이다. 생각하기를 미루며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것, 극단적 합리주의자는 이렇게 또 순간을 평가한다. 안되면 매일 1일이라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고생도 사서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지만 늙어 고생은 사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아는 나이가 된 지금 에는 머리를 좀 더 써보면 어떨까 싶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또한 얼마만큼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오늘 내가 사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배려와 용서와 희생에서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시간 부자이면서 빚진 자는 오늘도 내것이면서 내것 같지 않은 시간의 질을 회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