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남성복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교복 대신 양복을 입었던
토퍼(@topper_kdh) 작가의 애장품,
탑 했을 소개합니다
* 제조국: 프랑스
* 생산연도: 1896년
* 크라운 높이: 15.8 cm
* 헤드홀 너비: 19.6 / 15.2 cm
* 소재: plush
* 사이즈:6 ⅞ (21.5inches)
1896년, 대한제국이 1897부터이니 말 그대로 이조시대, 즉 조선시대 물건인 셈이다.
탑 햇(top hat)이라는 서양 모자이다. 흔히들 마술사 모자들로 알고는 하는데, 정확히는 귀족 층들 앞에서 공연하기 위해 마술사들이 복장을 갖춘 것이었기 때문에 신사용 모자로 알고 있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주/야간 예복 등과 예를 차리기 위한 양복 차림에 쓰던 모자이다. 물론 요새는 군주제가 살아 있는 일부 국가(영국 일본 등)를 제하면 거의 쓰이지 않긴 한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배어 있는데 전 사용자들이 얼마나 챙 앞쪽을 만져댔는지 앞쪽은 털이 다 빠졌다.
크라운(모자의 챙을 제하고 그 위의 부분)의 각진 모서리도 많이 해졌고, 브림(챙)의 모서리를 감싼 천은 군데군데 뜯어져 있고, 사진상으론 잘 안 보이지만 바느질이 다 뜯어져 있기도 하다.
챙의 아랫부분도 천이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모습, 세월이 흐른 탓에 본래에는 검은색이었던 천도 녹색으로 바래져 있다. 땀이 모자에 스며들지 말라고 달아놓은 땀받이 가죽을 이어놓은 바느질도 곳곳이 뜯어져 있어 전 사용자들이 얼기설기 바느질을 해두었다. 이러면 나중에 전문적인 곳에 수리 맡길 때 더 힘든데….
요새도 이런 모자들을 생산하긴 하지만 이 시절 모자들만큼 광택이나 크라운의 곡선이 아름답진 못하다.
이렇게 크라운 부분의 위쪽이 종의 아랫단처럼 곡선을 그리는 경우를 벨(bell) 크라운이라 한다. 그중에서도 이 정도로 곡률이 우아한 경우를 풀벨(full-bell), 이보다 곡률이 덜한 경우를 세미벨(semi-bell)이라고 한다.
크라운의 윗부분, 미국의 모자 회사들 중 일부는 이 윗부분의 정중앙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작은 철망으로 막아 나름 공기가 통하게끔 만들기도 했었다. 얼마나 통기가 되겠느냐만은… 앞서 기술했듯 여기저기 대미지가 많아서 여유가 생기는 대로 영국으로 보내 수리를 맡길 생각이다. 아마 챙 앞부분은 수리가 안 될 듯 하지만.
이 탑햇을 손에 넣은 것은 18살, 그러니까 11년 전이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양복을 막 입기 시작하며 이 시대의 양복에 대해 막 공부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러던 중 왜인지 모자부터 입수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틈만 나면 이베이에 들어가서 탑햇 매물들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모자는 내 2번째 모자이다. 첫 번째 모자는 독일제로 1918년 산이었고, 모양새가 이 불란서제보다는 곡률이 덜한 편이다. 여담이지만 이 2번째 모자까지 사고서야 깨달은 건데 내가 둘레를 잘못 재서 너비는 맞지만 둘레가 작은 모자를 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이베이를 탐닉하던 중에 이 예쁜 모자가 경매로 올라온 것을 확인, 구매대행 블로그에 의뢰했다. 당시만 해도 직구라는 것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대행을 해주는 카페가 제법 있었다. 경매에다가 판매국이 프랑스인지라 경매 종료 시각이 새벽 2시 반 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죽하면 대행 카페 주인이 자기 이베이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알려주면서 직접 입찰하라 했겠는가.
입찰 과정에서도 판매주랑 꾸준히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당시 64세의 카를(?)이란 이름의 불란서 할아버지였다. 모자는 동네 플리마켓에서 건져서 올린 물건이라고 했다. 꽤나 열심히 메일을 주고받았던 탓인지 모자를 사고도 대략 6개월 정도를 간간이 연락을 했다. 그래서 그랬던가 카를도 모자를 꼭 내가 입찰하길 바란다고 했었고, 내가 입찰하자 제일 빠른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이 모자는 5일 만에 불란서에서 이 먼 조선 땅까지, 그야말로 특급으로 배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