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의 해답
이런 욕구와 감정을 자각했던 올해, 전보다 열등감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그냥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부분도 있고, 뒤이어 걸맞는 해결책을 실천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첫 번째 욕구의 충족 대안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근원적 자존감에는 성장기 애착 대상의 역할이 꽤 중요하다 배웠는데, 무심한 가정에서 자란 나는 그런 사랑을 감지할만큼 성숙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그런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미숙했다. 앞으로 그런 애착 대상을 만날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래서 내게는 두 번째, 벌벌떠는 그 마음을 수용하고 담대하게 넘어서는 용기가 더 효과적이었다. '너가 생각하는 것만큼 못생기지 않았어. 예뻐. 괜찮아'와 같은 얕은 위로나 상대성에 대한 인지적 통찰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못생김을 '완전 인정'하고, 파생될 불이익들(?)까지 '기꺼이 감당'하겠노라는 통큰 마음이었다.
'이미 못생긴 거 잘 알고 있는데?'싶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완전 수용'이 되지 않아 열패감을 느끼다가도 누구보다는 낫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헛된 희망을 갖다가 체념하기를 나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었다. 못난 모습에 대해 100프로 수용이 되면, 그렇게 동전 뒤집히듯 번뇌하지 않게된다. 애초에 못났는데 뒤짚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인정이 될 때, 비로소 평가절하, 거절, 비판, 소외 등에 대한 두려움들을 기꺼이 감당할 단단함이 생김을 이해했다. 무리하게 애쓸 필요가 없다는 홀가분함이자 그래봤자 감당 가능한 고통이라는 배짱이기도 했다.
이런 나름의 이치를 깨달았던 올해 5월의 어느 날은 그 동안 바둥거렸던 내가 짠해서 눈물이 났다. 뭐 그리 대단한 내가 되겠다고 많은 순간을 괴로워했던가. 그저 나부터 나를 그대로 받아줘버리면 편한 것을. 어쩌면 이토록 참 간단한 일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