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적어도 일 년 동안은 열심히 여행 다니며 놀자고 했다. 그것이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스스로 주는 상 같은 개념이었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하지만 서둘러 주말 주중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던 일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일 년 후 어떤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겐 엄청난 시간이 있으니 ‘아무 때나’가 오히려 어울리는 말이었다.
여섯 시부터 시작되었던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하는 일들로 바뀌었을 때 이것이 진정 누릴 수 있는 ‘행복+자유’라고 착각했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보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게으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집에 있는 시간은 길어졌는데 집안일은 더 열심히 하지 않게 되는 것과
출근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거울도 안 보는 여자가 되어버린 것도 그렇고
매일 각 잡아 정리해 놓았던 침대며 소파가 늘 헝클어져 있는 것도 그렇고
잠옷 바람에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다시 잠들 때도 있고
손에는 항상 핸드폰 아니면 리모컨이 쥐어져 있었으니….
마치 도롯가에 키 작은 나무며 꽃들을 칡덩굴이 덮어버리도록 방치한 것처럼 게으름이 일상을 덮어버리도록 내 버려둔 것이다.
남편도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티브이 보는 시간도 낮잠 자는 시간도 늘어났다.
가끔 남편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에서도 첫마디가
“요즘 무슨 일 하는교?” 아니면
“우째 지내는교?” 이다.
다들 퇴직 후의 생활이 본인들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는가 보다.
멀리 이사를 왔으니 이웃에 사는 친구도 없다. 그러다 보니 남편이랑 모든 일들을 같이하게 되고 차츰차츰 데칼코마니가 되어갔다.
장을 보러 같이 다니고, 쇼핑도 같이하고, 운동도 같이하고, 심지어 핸드폰도 공유한다. 예전에는 같이 하던 일이 아니다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남편과 더 가까워졌다. 퇴직 후엔 염색하지 않아 백발인 남편이 후덕하고 멋있게 보였다. 가끔 비스듬히 누워 곤히 낮잠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면 짠할 때도 있지만.
우린 그렇게 24시간을 나름 잘 지내고 있었다.
가끔 파크골프장에서 아니면 길을 가다가 우연히 회원들을 만나면 그들은 우리를 보고 샴쌍둥이냐고 놀려대곤 했다.
샴쌍둥이라...
나는 이 말을 금실이 좋은 부부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그 뜻이 ‘매일 같이 있는데 지겹지 않냐?’는 것임을 눈치로 알았다.
왜???
파크골프장에서 만난 순애 언니도 우리 부부처럼 샴쌍둥이 수준이다. 유쾌한 순애 언니는 오히려 언니가 남편을 향한 해바라기다.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지….
그 언니 말에 의하면 파크골프장에 나오는 남자분들은 두 분류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아침에 나와서 공을 치다가 12시가 되면 몇 번 홀에서 치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저 먼저 갑니다.”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야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다고.
또 한 분류는 점심을 사 먹는다는 것이다. 근처에 가장 저렴하게 식사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삼삼오오 모여서 먹는다고 했다.
하루 한 끼 정도는 밖에서 해결하라고 해서라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놀랍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남편이랑 아침 식사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의 표정은 놀라기보단 무덤덤해 보였다.
남편 친구 중에도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일명 ‘삼식이...’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나가서 혼자 사 먹는다는.
누가 지어낸 이름인지는 몰라도 이쁜 이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뿐이 아니다.
집에서의 생활도 나뉘어서 화장실 청소도 각자 한다고 하니 참...
그래서 그랬나?
월세 세입자가 이사 가는 날 그 아파트에 가게 되었을 때 현관 입구 화장실을 세입자 남편분께서 급하게 솔질하고 물을 뿌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었는데 어쩌면 그분들도 화장실을 나눠서 사용하고 각자 청소하며 살았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어때서?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같이 쉬고 있는 내 처지에서 본다면 한평생 열심히 돈 벌어다 주고 가족을 위해 헌신한 일은 고마운 거니까 끝까지 고마워하며 살 자가 내 기준일 뿐이다.
요즘 흔히 듣는 단어가 ‘자존심, 존재감’ 등이다.
이 단어들은 성장하는 어린아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노인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과거의 모습에 비추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존심 하나로 지금껏 버티며 살아왔지.’라던가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 라던가.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늙으면 말 수를 줄이고 들어주라’라는 말이 얼마나 멋있는 말이던지.
자존심과 존재감은 스스로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내세우지 않아도 조용히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으로 충분히 지켜진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이다.
내가 꼭 되고 싶은 자화상은 엄마답게, 아내답게도 좋지만, 더욱 나답게 사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노인답게’ 사는 것이다.
노인다워진다는 것이 세월 간다고 저절로 인자해지고 너그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성품도 있겠지만 양보와 끝없는 관용을 베풀 때 비로소 괜찮은 노인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늙으면 다 그래”로 퉁치면서 살 것인지 아니면 “늙어도 멋지다”로 살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할까 말까 하는 망설임 앞에서 주저 거릴 시간이 없다.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그래야 오랫동안 호호 할머니로 살아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