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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미화 Nov 17. 2024

절정이라는 말

  멀쩡한 게 하나도 없다는 언덕으로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

  눈도 코도 입도 흐려진

  우리는 붉은 립스틱을 챙겨 길을 나섰고


  갇힌 여인들이 립스틱이 없어 창백을 감추지 못했다는 아우슈비츠, 그 기억이 왜 떠올랐을까 붉은 기운 돋우려 입술을 깨물었을까 


  무서운 것이 잊혀진 무서운 세상에서

  속이 타들어 가야 단풍놀이를 나설 수 있냐고 물어오면


  고통에는 고통이 없다고

  이렇게 수북한 잎들

  색이 바래지고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입술을 덮고 구멍 난 잎을 덮고

  낙엽 위에 두는 발은 흔적 없어 미끄러지는   


  죽음에 차렷 경례,

  폭력과 비문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하나둘 사라져간 여인들의 립스틱 색을 찾을 수 없어 핏빛 단풍놀이는 끝나고 무엇을 몸에 문지를까 생기를 찾아야되는데 벗어나야 하는데


  말라가는 잎이 많으니 절정이지요 슬픔에는 슬픔이 없는 것, 난장의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죽음에 차렷 경례!


  절정이라는 말의 멀쩡함,


  대낮을 나선 우리는 우리라 말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이 되물었다 떨어진 잎들은 색바랜 립스틱으로 오래도록 붉었다


  입술이 까매지도록 어둠을 물고 있는 날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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