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식 : 과거에 비해 인생게임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나이가 들면서 어린이·청소년 시절을 까먹게 된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큰 사건을 제외하면,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많지 않다. 애써 특정 시점을 떠올려 보면 스치는 이미지나 숏폼은 있지만 드라마처럼 연결되진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시절 인생게임들이다. 정말 좋아했던 게임은 어디서 우연이 제목을 보거나 이미지만 보더라도 뇌의 시냅스가 금방 이어진다. 과거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인데, 이런 작품들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신기하다.
과거에는 출시, 한글 정발되는 게임 개수도 적었고 돈도 없었다. 수개월 용돈을 모아야 패키지 게임을 하나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인생게임으로 여기는 작품들이 꽤 있다. 현재는 스팀에만 1년에 약 10,000개의 새 게임이 업로드된다.모든 게임이 한글을 지원하지는 않지만 과거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택지가 많다. 그러나 그에 비해 인생게임으로 삼을 만한 것은 별로 없다. 이상하다. 이게 그냥 과거 미화와 느낌적인 느낌인지,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내 기준, 2000년과 2020년을 단순 비교해 보겠다.
- 2000년 출시 게임 약 200여 개 중 (나무위키 기준)
인생게임 : 디아블로2, 킹덤 언더 파이어, C&C레드얼럿2, 임진록2.
- 2020년 출시 게임 약 9,400여 개 중 (스팀스파이 기준)
인생게임 : 라스트오브어스 파트2, 데스페라도스3, 하데스.
변수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엄밀한 비교라고 할 수 없지만, 어쨌든 현재에는 출시되는 게임에 비해서 내가 느끼는 인생게임의 숫자는 너무 적다고 느껴진다. 이유는 무엇일까?
어떨 때 인생게임이 되는가?
어떨 때 인생게임이 되는지부터 살펴봐야겠다. '인생00'이란 말이 가장 널리 쓰이는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보자.
누구든 인생에서 최고로 꼽는 영화가 있을 것이다. 각자의 선택은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명작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재미와 의미가 둘 다 있어야 한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명작'으로 꼽지는 않을 것이다. 재미와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대중성(익숙함 또는 재미)과 예술성(새로움 또는 의미)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도 비슷하다. 재미가 가장 중요하지만 플러스알파가 있어야 인생게임이 될 것이다. 롤모델이 되는 매력적인 캐릭터, 감수성을 자극하는 감동적인 스토리, 게임 클리어를 통해 얻는 성취감, 게임의 경험을 통해 얻는 교훈, 그리고 가상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역할 경험 등이 있어야 한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대중성(익숙함 또는 재미)과 예술성(새로움 또는 의미)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인생게임이라고 하면 이 둘 다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생게임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
과거에 비해 인생게임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를 알 것 같다. 첫째는 재미와 의미에 대한 역치가 점점 높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한두 번은 재밌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려울 것이다. 항상 기존의 재미 그 이상이 요구된다. 특히 게임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첫번째 이유는 게임으로 새로운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VR기기는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누구든 마음을 내면 살 수 있는 정도로 가격이 내려왔다. 그럼에도 다수의 게이머의 지갑을 열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는 새로운 경험을 주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하프라이프-알릭스'를 제외하면 VR은 기존의 게임에서 화면이 달라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두번째 이유는 익숙하면서 새로워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게임들은 게임 역사상 최고로 진화된 게임들이다. 특별히 의도한 경우가 아니면, UI나 UX는 계속해서 직관적이고 편리하게 발전해 왔다. 게다가 장르마다 그 장르를 대표하는 성공적인 게임이 표준 아닌 표준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게이머들이 해당 장르에 대해 찬사를 보낸 지점들을 계승하면서 적절하게 새로운 플러스알파를 조합해야 한다. 게이머들에게 익숙함을 희생하길 요구하면서, 새로운 매력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오늘도 인생게임을 찾기 위해 수많은 게이머들은 인터넷과 유튜브에 검색을 하고 상점을 드나든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너는 어떤 게임을 좋아하니?"라는 질문에 준비된 대답은 없다. 내가 좋아했던 게임과 장르를 나열하면서 "그냥 이런 스타일 게임 좋아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인생게임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찾는 것에 비하면 특별한 기준을 정해 놓은 것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그저 게임이기에 그렇다. 이게 무슨 진로 설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재밌자고 하는 게임에 '인생게임의 기준'까지 정해 놓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인생게임을 잘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모르겠지만 왜 찾기 어려운지는 알 것 같다. 특별한 준비 없이 찾기 때문이 아닐까? 구조적으로 인생게임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게이머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은 이전에 재밌게 했던 게임과 장르에 대한 데이터뿐이다. 이미 상점이나 스토어에서 빅테이터 시스템이 맞춤 추천을 해주긴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게임을 만나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게임을 만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설정이자 장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다.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인 삶을 위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야말로 본래의 인간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대부분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만 그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캐릭터를 좋아한다. 중요한 점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현실적이지 않게 타인에게 헌신적이고 착하고 이러면 안 된다. 충분히 세속적이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은 모습이어야 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생각거리를 주기만 하면 선형적인 스토리어도 상관없고 엔딩이 다소 허무해도 괜찮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장르나 설정(포스트 아포칼립스물), 캐릭터(세속적이면서도 인간적), 스토리(생각거리를 제공) 등 기호를 정리해 둬야 할까?
“현실을 마주하고서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환상의 힘'을 되찾는 것이다.”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아자키 하야오 감독의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가 게임을 하는 이유는 '환상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다. 게임이 현실과 비슷하거나 현실의 연장이라면 굳이 게임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게임을 만나는데 현실의 기준과 방법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현실에 없는 환상적인 방법-우연히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을 기대하는 게 게임답다. 기준을 없애고 문을 활짝 열어두는 편이 오히려 인생게임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