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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삼 May 02. 2024

은근히 존재하는 나의 식탐

냉장고 속의 윌

부모님이 모두 집을 비우시고 아이와 나만 집에 남아 있는 휴일. 뭘 먹을까 냉장고를 뒤적거리다가 야채칸 깊숙이 양배추 뒤에 숨어있는 윌 하나를 발견했다.



위장 강화에 도움을 준다는 이 달고 맛있는 음료는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지만 생각보다 비싼 가격 때문에 자주 사 먹지는 않는다. 한 병에 무려 1,800원이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는 동네에 친분이 있던 아주머니에게서 윌을 자주 주문하셨었는데, 분명히 한 봉지 가득 사는 걸 보았는데도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건 모두 아빠 거였다. 잦은 부부싸움의 기억으로 덮여있어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내조의 여왕이었다. 아빠 건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구해다 요리해 드리곤 하셨다. 윌은 가끔 대량 구매를 했을 때만 우리 남매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는데 어린 입맛에도 왜 그리 맛있던지! 하지만 몇 모금 넘기지도 않았는데 야속한 바닥은 그 모습을 드러냈고 아쉬운 입맛만 쩝쩝 다시곤 했다. 스스로 냉장고를 뒤질 수 있는 중고등학생 때가 되었을 때 엄마는 우리-아닌가 난가?- 나에게서 윌을 지켜내기 위해 냉장고 깊숙한 곳에 숨겨두곤 하셨다. 가끔 윌을 발견하고 엄마에게 원망스레 "와~ 나 먹지 말라고 숨겨놓은 거 봐. 진짜 너무하다"라고 불만을 토로하면 엄마는 "아니 숨겨놓은 게 아니라 거기 두고 깜빡했네"라고 괜스레 미안한 듯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나중에는 당당하게 "그래. 아빠 거니까 먹지 마"라고 말씀하셨지만..)


윌뿐 아니라 어떤 맛있는 음식을 냉장고에서 발견하면 항상 엄마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대체로 나를 위해 준비된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어떤 음식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하교 후 냉장고에 있는 요리된 음식을 먹었다고 혼난 적이 있다.(다 먹었는지 조금 먹었는지 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다 먹었으니까 혼났겠지?) 한창 많이 먹고 키가 자라는 시기의 청소년에게는 지금 생각하면 조금 가혹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식욕은 많지 않지만 식탐은 좀 있는 편이다. 예를 들면 눈앞에 있는 음식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끝까지 먹어야 한다. 남겨뒀다가 다음에 먹는 선택지 따위는 없었으므로. 이렇게 식탐이 생기게 된 데는 이런 성장기의 배경도 한몫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지만 3n살이나 먹고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 따위는 없다. 나는 이제 먹고 싶은 건 내 돈으로 사 먹을 수 있는 어엿한 직장인이고 그때의 엄마는 나 말고도 챙겨야 할 사람이 많았으니까.





냉장고 속에서 발견한 윌을 손에 들고 한참이나 생각했다. '이것도 아빠 드리려고 놔둔 걸까? 아니면 엄마 드시려고 놔둔 건가? 하나만 있는 걸 보니 정말 까먹었나? 먹고 싶다.' 이제는 아무도 나에게 뭔가를 먹지 말라 제재하지 않은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먼저 줘야 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 '아이 줄까? 아니 그냥 엄마나 아빠 드시게 놔둘까?'

마치 냉장고를 새로 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고민을 한다. 왜 이 음료하나 당당하게 마시지 못하는가, 나 자신이 서글퍼질 무렵 결론을 내렸다.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존중해야 하니까, 나에게 가장 맛있는 걸 주자! 먹고 새로 사놓으면 되지 뭐~'

합리화를 끝내고 순식간에 윌을 들이켠다. 물론 빈 통은 재활용봉투에 들어가고 냉장고 야채칸에 윌이 새로 들어오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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