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몇 학번 이예요?” 처음 만나 나이를 물을 때 사용되곤 하는 질문이다. 이어서 “전공이 뭐예요?”란 질문이 이어진다. 이 질문이 시작되면 나는 대답을 회피하고 싶어 심장은 따끔거리고 얼굴이 붉어진다. 간신히 대답을 피해도, 용감하게 고졸이라고 대답해도 마음은 이미 지옥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말투 하나하나에 눈치가 보인다. 나를 무시하는 말투 같고, 나를 하찮게 여기는 시선 인 것만 같아 괴롭다. 이렇게 시작된 학력에 대한 열등감은 나이를 먹으면서 외모, 독서량, 영어, 일반상식 등 대부분의 분야로 확장되었다. 점점 비대해지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많은 돈을 외모를 꾸미고 사치하는데 썼다. 읽지도 않을 책을 사서 모았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사치였다. 그 결과 직장생활 30년 동안 적지 않은 돈을 벌었음에도 아직 갚아야 할 대출이 남아 있으며 내 집이 없이 작은 원룸에 세를 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 강력한 힘을 가진 열등감이 되었다. 열등감을 감추려는 행동은 오히려 열등감을 증폭시켰고, 증폭된 열등감은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밖으로 사람들 앞에서 밝은 척 쿨 한척 행동할수록 안으로는 그런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져 스스로를 싫어하는 마음은 점점 더 커졌다. 자기혐오는 우울증, 불면증, 폭식과 무리한 다이어트의 반복, 긍정의 과잉표현 등 여러 가지 양상으로 발현되어 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다. 이제 그만, 삶을 병들게 하는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위나라에 아주 못생긴 사내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애태타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와 함께 있어 본 남자들은 그의 매력에 사로잡혀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를 한 번 본 여자들은 앞다투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분의 첩이 되겠어요’라고 부모께 청한답니다. 그가 먼저 나서서 뭔가 주장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맞장구를 칠뿐이랍니다.” <낭송장자/북드라망/이희경/p.123>
아는 것도 자기가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 정도이고, 다른 사람을 배불리 먹일 재산도 없고, 왕의 지위가 있어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 주는 것도 아니고, 흉측한 몰골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인 애태타는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내가 상대적 결여를 느껴 열등감을 가지게 된 외부조건들이 애태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펙만 보면 애태타가 나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 나라면 흉측한 몰골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열등감에 휩싸여 사람들로부터 숨어버릴 것 같은데, 애태타는 사람들 속에 함께 했고,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애태타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외부조건과 상관없이 사람들 앞에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음이 부럽다. 애태타는 스스로 주장하는 바가 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맞장구를 칠뿐이다. 나도 애태타처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맞장구를 엄청 잘 친다. 그런데 나는 맞장구가 지나쳐서 불편하다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다. 도대체 자신의 말이 옳다고 맞장구를 쳤는데 그게 무엇이 불편하다는 건지 억울했다.
오강남 선생은 “‘애태타의 맞장구를 칠 뿐인 것’을, 화이불창(和而不唱), 즉 ‘나’라는 자의식(自意識)에서 완전히 풀려난 상태이고, 이는 둥근 그릇에 들어가면 둥글어지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추우면 얼고, 더우면 증발하는 물의 상태를 뜻한다.”<장자/현암사/오강남 풀이> 고 풀이했다.
나는 애태타가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외부조건에 매이지 않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의식의 해체가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했다는 말이다. 헉! 내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내 의견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의식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동안 내가 자의식을 키운답시고 읽었던 책이 몇 권이며 아침마다 긍정확언을 했던 날들이 얼마이거늘. 그런데 그 이유가 자의식의 부족이 아니라 오히려 비대해진 자의식이 열등감으로 발현되었기 때문이라니! 이제야 나의 맞장구가 불편하다고 했던 벗을 이해할 것 같다. 나의 맞장구가 물의 형태를 닮지 못했으니, 이는 세모난 그릇에 그저 세모의 모양일 뿐 크기는 다를 수 있는 돌멩이를 끼워 맞추겠다고 한 꼴이 아닌가. 다행이 그 크기가 맞아떨어지면 편안했을 테지만 조금이라도 기울거나 크기가 달랐다면 불편함을 느낀 건 당연했다. 왜 물의 형태여야 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그는 타고난 바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삶과 죽음, 지킴과 잃음, 부귀와 빈곤, 현명함과 어리석음, 칭찬과 비방, 목마름과 배고픔, 더위와 추위, 이런 것들은 사태의 추이가 바뀌는 것, 자연의 운행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수없는 변화들이 원래 하나라는 것에 통달하면 마음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시시각각의 변화에 완벽히 응하게 되면 만물과 함께 늘 새로 탄생합니다. 이렇게 되면 만물을 만나는 모든 순간이 매번 꽃 피는 순간입니다. 이를 ‘타고난 바탕이 잘 보존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낭송장자/북드라망/이희경/p.125~126>
나의 열등감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 욕망이 ‘나는 어떠해야 한다.’는 외부조건의 기준을 만들었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싫어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외부조건이란 단지 자연의 운행이 달라지는 것일 뿐임을 깨달아야만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귀와 빈곤, 현명함과 어리석음, 삶과 죽음마저도 자연의 운행이 달라지는 것일 뿐인데 고작 학력쯤이야, 재력쯤이야. 변화에 완벽히 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나의 운명 사용설명서/고미숙/p.71>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는 많은 저항이 따를 것이다. 대학을 나오고, 적당히 직장생활 2~3년 하다가, 여러모로 괜찮은 남자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아파트 장만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외부조건에 대한 욕망이이야말로 가장 큰 저항이다. 이 세속적 욕망을 버려야만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애태타가 가진 ‘타고난 바탕을 잘 보존하는 것’일 것이다.
내가 ‘고졸에 원룸 사는 뚱뚱한 51세 독신 여자라는 것’도 단지 계절이 바뀌듯 변화하는 수많은 순간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여전히 이 외부조건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저 조건들 중 내가 의연히 받아들일 게 된 것은 학력과 나이 뿐이다. 나는 아직 날씬해지고 싶고, 노후를 보낼 안락한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애태타의 성심을 닮게 된다면 남은 세속적 욕망도 털어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주재자가 있어 나에게 "애태타의 본바탕을 잘 보존하는 성품을 너에게 줄 것이니 애태타의 흉측한 몰골도 함께 받겠느냐?"라고 묻는다면? 아! 이런!! 나는 차마 "네"라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망설임 없이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애태타를 닮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거짓인건가. 저 질문은 나에게 시련이 틀림없다. 아! ‘외모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나’마저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아니면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주재자의 저 물음에 ‘네.’라고 선선히 대답할 수 있을까? 도대체, 나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이제 나에게 남은 과제는 주재자의 저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나의 본바탕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자의식으로 인해 꽁꽁 숨어버린 나의 본바탕을 찾아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훈련이 반복되어야 할 것이다.
“주재자여! 당신의 그 물음은 아직 저에게 너무나 과합니다. 부디 거두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