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행위하고 사유할 것인가?
2023. 6. 7. |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 주간에라스무스 Critical Book Review 공개
Arendt, H. 서유경 옮김(2023). ⟪과거와 미래 사이: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연습⟫. 한길사.
이진호 | 서울대학교 교육학과(교육철학) 박사과정
성균관대학교에서 영상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교육철학 전공으로 교육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울대학교에서 교육철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과정 중에 있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교육, 교육과 기술, 교육과 예술, 시민교육, 그리고 교육의 공공성 등이다.
1. 들어가며
한 권의 책을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일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한 편으로는 지식 세계의 전체적인 지형 안에서 책의 위상과 의의를 밝히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저자가 처한 당대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반영하여 책의 내용에 관한 해석을 제공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며, 그것도 아니라면 (저자가 충분히 저명한 경우) 저자에 관한 다른 연구물을 참조하는 우회로를 통해 책의 심층적인 의미에 다가서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는 대체로 충분한 사전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치철학의 대가 중 한 명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책 ⟪과거와 미래 사이: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연습⟫(이하 ⟪과거와 미래 사이⟫)을 그러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것은 나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여전히 가능한 한 가지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솔직하고 겸손한 독자의 입장에서 책과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책과 나 자신을 ‘함께’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접근일 것이다. 하나의 예시로, 아렌트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사적인 인연과 철학적 연관은 주지의 사실이지만(그리고 실제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도 하이데거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종종 눈에 띄지만), 반드시 그러한 철학적 배경을 먼저 알아야만 이 책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잘 쓰인 책이 그렇듯, 아렌트의 ⟪과거와 미래 사이⟫ 또한 자신의 논지를 충분히 완결성 있게 개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독자적인 만남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글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는 아직 철학책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한 번쯤은 독서를 시도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보는 데 있다.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서로 다른 8편의 에세이를 담았지만, 그것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공통된 문제의식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마 그러한 공통된 문제의식이 바로 저자인 아렌트가 집중하고자 했던 문제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글에서 논하려는 내용은 아렌트가 작성한 각각의 에세이에 관한 비평이 아니라, 오히려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 아렌트의 ‘철학 연습’을 따라 걸어본 또 하나의 철학 연습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아래에서는 먼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아렌트의 문제의식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이해한 뒤, 그로부터 발견한 질문과 답을 우리의 현실에 투사해봄으로써 이 책의 의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2. 행위(정치)와 사유(철학)의 문제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실린 에세이 전반에서 분명하게 정치사상에 관한 논의를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렌트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정치사상 일반에 관한 포괄적인 내용이 아니라, 서양 문화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되는 어느 ‘한’ 정치사상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아렌트가 관심을 두고 있는 어느 한 정치사상이란 과연 무엇일까?
아렌트에 따르면, 서양 정치사상의 전통은 확실히 고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연원한 뒤로 계속해서 이어지다가, 현대의 마르크스에 이르러 종식되고 만 것처럼 보인다.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도 인간은 국가와 정치 영역을 이루며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렌트가 플라톤에게서 서양 정치사상의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정치적 행위와 철학적 사유를 최초로 연결 지으려 시도한 사람이 플라톤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서양 “정치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정치에 등을 돌렸다가 자신의 기준을 인간사에 부과하기 위해 귀환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p. 100, [ ] 안의 내용은 한국어판).
인용한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시한 정치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정치라는 영역의 근간을 철학이라는 정치 바깥의 영역에서 발견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먼저 플라톤이 살던 무렵 고대 아테네의 자유인들은 오직 “여가 시간을 보유했다는 전제 아래서만” 시민일 수 있었고, 이러한 전통을 따르는 서양 문화권에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시민을 “노동을 하지 않거나 자신의 노동력 그 이상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간주해 왔다(p. 102).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여가(σχολή, 스콜레) 개념은 더 넓은 의미로, 그러니까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과 국정 업무로부터 자유로운 시간”까지도 포괄하는 의미로 새롭게 정립된다(p. 103).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으로 시민다운 삶을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로부터의 자유까지 보장받음으로써, 행위가 아닌 사유(철학)에 헌신하는 “관조적 삶”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p. 103).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으로부터 서양 정치사상의 어느 한 전통이, 그러니까 자유로운 인간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정신의 활동인 ‘사유’가 현실의 활동인 ‘행위’에 대한 우위가 인정되는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러한 정치사상의 전통이 “사유와 행위, 관조와 노동, 철학과 정치의 전통적 위계를 뒤바꿔” 놓은 마르크스의 사상이 등장함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p. 101). 마르크스는 정치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유의 위치조차도 “인간의 공동세계 외부가 아니라 바로 그 내부”에 있음을 강조하며, 철학적 이상이 실현되는 것은 오직 인간이 함께 삶을 영위하는 사회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p. 99). 그러므로 이러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기존의 정치사상 전통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를 보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서 철학은 인간사 너머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관심을 두었을 뿐 인간사 자체에는 직접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그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만 정치적 행위의 “지침”이 되었을 뿐이었다(p. 108). 이와는 달리, 마르크스의 사상에서는 정치적 행위를 위해 철학과 사유를 동원할 것이 요청되는데, 그 이유는 마르크스에게 철학이란 “실현”되어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p. 105).
아렌트가 보기에, 이처럼 마르크스가 시도한 전통에 대한 저항은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모순이 오히려 사유와 행위를 대립시킴으로써 양쪽 모두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아렌트의 염려는 단지 마르크스의 사상이 추구했던 정치사상 자체의 결함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 대한 마르크스의 저항이 결과적으로 서양 문화의 역사 속에서 전개된 정치사상 전통의 종말을 야기했다는 사실에까지 닿아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 역시도 전통에 대항해 사유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지만 전통 자체의 개념적 도구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정치사상 전통은 플라톤이 인간사로 채워진 공동의 세계를 외면하는 철학적 경험 속에도 어떻든 간에 정치사상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전통은 그러한 철학적 경험으로부터 그 어느 것도 남기지 않고, 단지 사유로부터 실재를 박탈하고 행위로부터 의미를 박탈함으로써 양자 모두를 무의미하게 만든 사유함과 행위함의 대립만이 남겨졌을 때 종식되었다(p. 111).
위의 인용문을 자세히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아렌트는 마르크스의 기획이 최종적으로 정치(행위)도 없고, 철학(사유)도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노동하는 인간의 평등이 도래하는 순간 모든 정치와 철학이 그 소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으로써 인간은 최종적인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정신적인 “사유” 능력에 있다는 전통에 저항하며 인간의 “행위” 능력에 집중했고, 그러한 행위 능력 중에서도 다시 불평등한 정치적 행위가 아닌 평등하고 자연적인 “노동”에만 집중함으로써 결국에는 사유와 행위 모두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p. 130). 그러므로 아렌트가 보기에 행위를 사유에 앞선 것으로 위치시킨 마르크스의 시도는 정당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행위와 사유를 서로 무관한 영역으로 밀어냄으로써 정치철학이 사유의 부재 속으로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한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과거와 미래 사이⟫에 드러난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무엇보다도 행위와 함께 사유가 다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행위와 사유가 동반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주장이 기존의 정치사상 전통에서처럼 행위보다 사유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거나, ‘생각을 좀 하고 행동하라’는 식의 일반적인 규범적 주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아렌트에게 있어 사유는 오히려 행위에 뒤따르면서 그 행위가 야기한 사건을 종결짓는, 그렇게 행위를 완성하는 정신의 활동으로써, (적어도 정치 영역에서만큼은) 행위가 사유에 앞서야 한다.
정치사상은 정치적 사건(비록 그런 것들이 간헐적으로만 언급된다 할지라도)의 현실태로부터 태동한다. 나는 사상 자체가 사건을 접한 산 경험에서 우러나오며, 그것의 함의를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안내판인 사건들과 묶여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p. 94).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상은 정치적 행위로부터 태동해야 하는 동시에 그러한 행위 역시 다시금 사유와 묶여 있어야만 한다. 아렌트의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일단 실행에 옮겨진 모든 사건은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의미를 전달하게 될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실제로 완성되어야” 하며, 이때 정신이 해야 할 일은 행위가 끝나고 난 뒤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p. 82; 84).
3. 정치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자유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렌트는 정치(행위)와 철학(사유)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현대의 문제를 지적하는 동시에, 행위와 사유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함으로써 그것들의 복원을 요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렌트는 어째서 철학의 다양한 주제 중에서도 특히 정치에 그토록 관심을 두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있어서는 아마도 아렌트에게 정치가 그 자체로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기보다, 오히려 정치가 (철학의 오랜 관심사인)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근원적이고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에 그녀의 철학적 관심에 부합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정치와 관련된 질문에서 자유의 문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아렌트의 말처럼, 그녀는 인간의 자유와 정치를 직결된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p. 286). 따라서 아래 인용문에 잘 드러나듯이, 우리는 아렌트의 철학적 관심이 향하는 곳이 정치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정치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인간의 자유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자유에 관해 제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정의・권력・평등처럼 정치영역의 많은 문제와 현상 가운데 하나인 것만이 아니다. 자유는 혁명이나 위기의 시점을 제외하면 좀처럼 정치행위의 직접적 목표가 되지 않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정치 조직 속에서 함께 사는 이유다. 가령 자유가 없다면 정치적 삶 자체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이며, 그것이 경험되는 장은 행위다(p. 287, [ ] 안의 내용은 한국어판).
하지만 아렌트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정치영역 내의 경험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을 도출하려는 그녀의 시도는 (나를 비롯한) 많은 독자에게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p. 300). 왜냐하면 우리에게 친숙한 기존의 정치 사상가들과 그들의 이론은 대개 인간의 자유를 현실 세계에서의 “행위”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의지와 사유의 부속물”인 것처럼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p. 300).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인간의 자유란 인간 특유의 정신적인 능력에 기인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익숙한 만큼이나, 아렌트가 말하는 ‘인간의 정치 행위와 직결된 자유 개념’은 낯선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아렌트의 독창적인 자유 개념의 의미를 꼼꼼히 살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아렌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정치적인 문제에서 인간의 자유를 “자명한 진실”로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그런 인간의 자유가 두 가지 인과성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다(p. 283). 그 첫 번째 위협은 현대의 과학적 이론 탐구 영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러한 위협은 모든 물리 현상이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것처럼 인간의 삶도 결국은 인과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간주함으로써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를 지속적으로 무너뜨려 왔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에 대해서 아렌트는 자연 세계의 인과성이 그 자체로 “인간사 영역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라며 단호히 반박한다(p. 284). 왜냐하면 현실 세계에서의 물리 작용과는 달리 정신 영역에서 인간에게 동기로 작용하는 것들은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객관적 관찰자로부터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주: 물론 이러한 비판은 인간의 내적 동기에 전혀 가닿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과학적 관찰과 같은 방식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영역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비판은 아렌트뿐만 아니라 현상학과 해석학에 기초한 현대의 많은 철학자에 의해 개진되어 왔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자연 세계의 인과성 공격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구제하기 위해 18세기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기획한 철학, 그러니까 인간의 정신 능력을 현실 세계를 향하는 “순수한”(pure) 이성과 인간의 내부 세계를 향하는 “실천적”(practical) 이성으로 구분하는 철학을 따라, 인간의 내면은 자연 세계의 인과성과 구별되는 고유한 목적론을 따른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p. 285). 하지만 아렌트는 이러한 철학적 기획이 인간의 자유를 사라지게 만드는 인과성의 난점을 극복하는 데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과학 이론보다도 심각하게 “우리의 실제적 행동이 기반하고 있는 자유를 무(nothingness)로 용해시키는” 것이 바로 정신 활동인 “사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강하게 비판한다(p. 285). 다시 말해서, 칸트의 철학과 그 계승자들이 자유의 자리를 인간의 내면으로 이동시킨 것은 그 자유를 다시금 목적론이라는 또 다른 인과성의 굴레 속에 가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깥 세계와 단절된 자유 개념을 정립함으로써 자유를 근본적으로 “정치적으로 부적합”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p. 287).
그러므로 아렌트는 이러한 “내적 자유” 개념이 정치 영역에 직결된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자신의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삼아 논의를 시작한다(p. 288). 이 같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아렌트는 서양 정치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맥락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자유 개념을 정당화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에서 일반화되어 있던 견해에 따르면 주군은 자신의 노예들 틈에서 거동할 때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자유는 그가 가정을 완전히 벗어나 자신과 동등한 사람들, 즉 자유인들 사이에서 거동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었다(p. 227).
인용문에서 살펴본 아렌트의 설명은 언뜻 우리의 통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통념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자유인은 인간의 자유를 위해 모종의 “해방”이, 그러니까 아렌트식으로 말하자면 ‘사적인 삶의 필요와 그것에 종속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p. 290). 따라서 이러한 해방을 위해 자유인은 노예로 하여금 그러한 노동을 전담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로 자유인에게는 마침내 자유가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아렌트는 자유인의 자유가 자기 대신에 노동을 수행해 줄 노예를 소유한 까닭에 생긴 것도 아니며, 나아가서는 남들에게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넉넉한 재산이나 사적인 공간을 소유한 까닭에 생겨난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자유인의 자유는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집을 벗어나 세계 속에 들어와 말과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생겨난다(p. 290). 왜냐하면, 아렌트가 볼 때 진정한 자유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언제나 타인의 현전을, 그것도 나와 동등한 타인의 현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p. 79).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아렌트의 철학적 관심이 결국 인간의 자유와 공적(정치적) 영역의 존재론적 동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다. [각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아렌트는 종종 공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을 “공적・정치적 영역”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둘을 거의 동인한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p. 275; 278 참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렌트가 보기에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동일한 지위에 있는 타인들의 동석(同席)”과 “그들을 만날 공통의 공적 영역”이 필요하다(p. 291). 아렌트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우리가 자유를 처음 자각하게 되는 경험이 “우리 자신과의 교제가 아닌 타인들과의 교제 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제시하며, 그렇게 자유는 “사유의 속성이나 의지의 특질”과 같은 정신적인 것이기 보다도 먼저 자유인 간의 “행위”에 수반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p. 290).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는 “행위의 수행과 동시에 발생”하며, 그렇게 인간은 이전도, 이후도 아닌 오직 “행위하는 동안에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p. 297).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자유롭게 되는 것”(to be free)과 “행위하는 것”(to act)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까닭이다(p. 297).
4. 나가며: 우리는 어떻게 행위하고 사유할 것인가?
이제까지 우리는 아렌트의 책 ⟪과거와 미래 사이⟫에 담긴 그녀의 문제의식을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하나는 서양의 정치철학 전통에서 나타난 행위와 사유의 관계였고, 다른 하나는 아렌트가 정치(행위)와 정치사상(사유)의 관계를 재설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정치 영역과 직결된 인간의 자유를 되살리고자 한다는 점이었다. 이번 절에서는 이러한 아렌트의 문제의식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 어떤 의의로 다가올 수 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만일 아렌트가 주목하고 있는 자유란 관념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관심사인 게 분명하다면, 아렌트의 철학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자유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자유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라거나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상태와 같이 우리의 욕망, 바람, 의지 등과 같은 정신적인 무엇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렌트가 볼 때 진정한 자유는 오직 공적 영역의 행위를 통해서만, 더 구체적으로는 세계 안에서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과 구별되는 개별자로서 실제로 행위할 때만 가능한 인간 고유의 경험이다. 이처럼 인간의 행위가 자유일 수 있는 까닭은 “행동에 돌입한 사람은 자신이 시작한 행위의 결과를 결코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p. 197).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위는 “이미 모든 것을 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훨씬 더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세계 속으로 등장시키는 어떤 시발점”이 된다(p. 197; 316). 그리고 이처럼 인간의 행위가 세계의 새로움에 직결되는 경험이라면, 그 행위의 순간에 인간은 자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만일 자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개인을 위한 영역을 확보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사이의 공적 영역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기에 이어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언제나 사유를 통해서 그런 행위가 완성된다는 아렌트의 주장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렌트는 인간의 행위가 일으킨 사건을 종결짓는 것은 언제나 사유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가 야기한 새로움에 대해서 우리가 기억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면(즉, 사유하지 않는다면), 나와 세계의 관계는 모종의 긴장과 전투 상황으로 돌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행위를 종결짓는 사유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비록 이 책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는 사유함의 방식 자체를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서문을 통해서 아렌트가 제공하는 사유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참조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오직 그가 사유하는 한 …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인 ‘있음’의 온전한 현실태로서 과거와 미래 사이의 간극 속에서 사는 것이다. … 시간의 심장부에 마련되는 이 작은 비-시공간은 단지 암시될 수 있을 뿐, 과거로부터 승계하거나 물려줄 수 없다. 새로운 세대는 물론이고 새로 태어난 사람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 사이에 틈입시킴으로써 이 통로를 발견해야만 하고 꾸준히 그것을 새롭게 닦아야 한다(p. 92-93).
인용문을 반복하자면, 사유하는 인간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 속에서 살아간다(p. 88). 바꿔 말하면, 그런 인간이 머무는 틈이란 언제나 과거와 미래라는 “무한”한 반대 방향의 힘이 달려와서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p. 93). 따라서 인간의 사유를 위한 자리인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 역시도 무한한 “과거와 미래의 힘들에 의해 창조되고 한정된 그 거대하며 항상 변전하는” 간극으로 남겨지는데, 아렌트는 이 간극이야말로 어쩌면 “진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유일한 구역”일지 모른다고 설명한다(p. 91; 94).
하지만 아렌트가 보기에 “문제는 우리가 사유함이라는 활동을 펼칠, 즉 과거와 미래의 간극에 안착할 자세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는 점이며, 어쩌면 이것이 아렌트가 ⟪과거와 미래 사이⟫를 통해 우리에게 철학 연습을 제안하고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p. 93). 아렌트가 “어떤 정신 현상”이라고 부르는 사유함은 오직 “연습을 통해서만, 특히 철학 연습들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p. 93). 그리고 이 책의 부제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연습’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 사이⟫에 담긴 아렌트의 의도가 철학 연습이라면 우리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아렌트의 철학 연습에 동참해 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아렌트의 추상적인 설명만으로 우리는 도대체 철학 연습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사유함이란 어떻게 연습하는 것인지를 전혀 알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 ⟪과거와 미래 사이⟫를 읽을 때만큼은, (마치 검색 엔진이나 AI에게 질문하듯) 명쾌한 답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아렌트가 제기하고 있는 질문을 아주 천천히, 꼼꼼하게 따라가며 그녀가 문제를 짚어내는 방식을 함께 좇아보는 일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아렌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사유의 결과물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유하는 방법상의 경험”을 얻는 것이 목적일 뿐이기 때문이다(p. 94).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내가 다룬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당연하게도 책의 전체 내용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아렌트는 1-2부에 걸쳐서 서양 문화에서 공적 영역을 지탱하는 데 전통, 권위, 종교가 해 온 역사적인 역할들을 조명하고 오늘날 공적 영역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과 전통, 권위, 종교가 사라지는 현상이 동시적이라는 문제를 짚어내기도 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노동, 제작, 행위의 관점에서 풀어봄으로써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한 현대에 지구와 세계를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지를 탐색하기도 한다. 이러한 아렌트의 논의들은 모두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생태와 기후 문제가 시급한 문제로 다가오는 우리 시대에도 그 함의가 결코 적지 않지만, 이 글에서는 나의 역량이 부족하여 전부 담아낼 수 없었음을 밝히며, 독자들의 철학 연습을 위한 소재들로 남겨놓고자 한다.
사실 아렌트의 ⟪과거와 미래 사이⟫는 지난 2005년 동일한 역자에 의해 번역되어 출판된 후 절판되었다가 2023년 1월 새로운 출판사에서 새로운 판본으로 출판되었다. 비록 한 권의 책이 번역되고, 출판되고, 절판되는 사연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개괄하기에 좋은 이 책이 다시금 국내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진심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라는 점이다. 독자의 편의를 고려하여 대괄호를 통한 섬세한 번역과 세세한 각주를 제공한 역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며, 이 책이 앞으로도 국내 독자들이 아렌트의 사상에 다가가기 위한 귀한 안내자가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