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김포공항에서 전철역으로 이어진 지하 통로가 있다. 거기를 지나가야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회색 금속 공간에 들어선다. 8분, 걸어 8분 남짓한 구간을 걷는 게 부당하다고 느낀다. 스스로 찾지 못한 원인으로, 타인의 이해를 구할 수 없는 이유로, 그저 기분이 그렇다. 벽과 바닥, 사람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벨트에 부딪혀 반사되는 LED 빛에 눈이 피로하다. 오롯이 전철을 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관문, 다른 무엇도 끼어들 틈이 없다.
송정, 마곡 방향 개찰구를 찾는다. 송정과 마곡이 남쪽인지 서쪽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방향이 목적지로 향한다고 믿는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하철 노선도는 내가 이 도시의 이방인임을 깨닫게 한다. 겹겹이 쌓여가는 낯설음, 그 위를 덮는 서러움. 나는 약해지고 겁을 먹는다.
길음역은 출구가 10개이다.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라. 출구마다 다른 길음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정확한 출구로 빠져나가지 않으면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목적지는 도로변에서 보이지 않는다. 길음 래미안 아파트 1단지와 9단지, 10단지로 둘려져 표지판도 없이 꼭꼭 숨겨져 있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아파트 숲 가운데로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넓은 하늘이 펼쳐지는 공간을 만난다. 도시 속 분지처럼 숨어 있는 수도원이 내 목적지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봉쇄의 땅. 허락된 사람만이 거대한 대문 안 풍경을 볼 수 있다.
수도원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백사장을 닮은 상아색 자갈이 깔린 오르막길이다. 길 왼쪽으로 수양벚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렸고 이어서 단풍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줄을 섰다. 길 끝에는 양팔 벌려 품에 안기에 벅찬 둥치를 자랑하는 늙은 나무가 서 있다. 오르막이 끝나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수도원 건물이 있다. 그 안에 50명의 수도자가 살지만 속삭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듯 깊은 침묵만 흐른다. 침묵 속에 오직 기도만이 소리가 되어 울린다.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하는 일도 기도로 바치는 곳이다.
10월이 되면 수도원 정원에서 풍요로운 색채를 감사하는 축제가 열린다. 나무도 돌도 건물도 온통 짙은 감물로 뒤덮였다. 올려다본 하늘은 쪽빛 바탕에 흰 무늬가 펼쳐진 명주천 같다.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어 뒤로 한껏 저친 고개를 내리지 않는다. 가야금과 리코더(초등학교에서 삑삑거리던 그 리코더가 맞다), 키보드로 화음을 맞춰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연주된다. 아름다움과 설렘이 가득한 날이 지속되기를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노래 가사처럼 10월의 낙엽 축제는 놓아야 할 잔상, 신기루 같다. 단 하루만 허락된 외출 같달까?
이제 나뭇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겨진 11월이 다가왔다. 11월은 위령성월, 죽은 이를 위한 레퀴엠이 연주되는 달이다.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이 묻혀있는 묘지를 방문하고 기도한다. 한 묘비 앞을 지나칠 수 없어 멈춰 섰다. ‘경이 아가다 수녀.’
수도회에서 맞은 첫 장례미사였다. 돌아가신 수녀님은 병원에서 입관 예절을 마치고 관에 누여 수도원에 돌아왔다. 얇은 커튼으로 관을 가리고 그 앞에 수수한 흰 꽃장식과 촛불이 놓인 빈소가 꾸려졌다. 살아남은 수도자들이 24시간을 꼬박 지키며 끊이지 않고 연도를 바친다. 장례 미사가 시작되면 동기 수녀들은 십자가와 영정사진을 앞세워 성당으로 관을 운구한다. 고별사를 들려주는 일도 동기 수녀들의 몫이다.
경이아가다 수녀님의 아버지는 이북 실향민이었다. 고향에 두고 온 처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다 아주 늦은 나이에 수녀님의 어머니를 만났고 더 늦은 나이에 수녀님을 낳았다. 경이아가다 수녀님이 수도회에 들어왔을 때는 부모님은 공양이 필요한 노인이었다.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부모님을 떠나 수도자가 되겠다는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수녀님의 선택을 존중한 부모님의 희생도 고스란히 수녀님의 짐이었을 것이다. 고별사는 경이아가다 수녀님의 수도 삶이 녹녹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끝까지 수도자로 살고자 힘썼다고 알려주었다.
수도회에서 최하위 계급이었던 지원자 시절, 장례 예식이 잘 보이는 2층 맨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원장 수녀님의 배려였다. 수도 삶이 완성되는 순간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수도 삶, 수도자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면 결국 수도자가 아닌 신분이라는 말. 지원장 수녀님은 끝까지 수도자로 정진하기를 강조했지만 나는 남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방식, 죽은 이를 기억하는 고별사가 더 인상에 남았었다.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고 이뤄낸 봉헌의 삶인지 재차 강조하던 읊조림에.
첫 서약을 마치고 동기들과 약속했다. 고별사는 너무 거룩하게 쓰지 말자. 진실을 가리는 미사여구로 기억을 왜곡하지 말자. 그저 살아졌을 뿐이다. 전철을 타기 위해 통과하는 수밖에 없는 지하도를 걷는 것처럼. 바깥 풍경을 훔쳐볼 수 없고 북으로 향하는지 서로 통하는지 알 필요도 없는 길 위를 묵묵히 걸었을 뿐이다. 수도자로 사는 일이 수도회 밖 세상의 인생보다 특별히 거룩할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다. 삶은 어디서나 고통스러우니까. 수도자로 생을 마감할 때 가질 자부심이 수도자로 죽는다는 것뿐이라면 속 빈 쭉쟁이와 같은 삶이었겠지. 나는 그보다 찬란한 이야기를 담은 삶을 살아갈 테다. 그러니 고별사는 자신이 쓰고 낭독만 부탁하기로 했다. 흔들리는 유혹 속에 굳세게 수도 삶을 살아갈 이도 있을 테고 유혹에 쓰러져 길을 이탈하고 다른 삶을 살아갈 이도 있을 테지. 어떤 모양이었든 죽음 앞에 가엽지 않은 삶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