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은 학력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학력은 한자 의미 그대로 배움의 역사를 뜻한다. 흔히 말하는 가방끈의 길이다. 그렇다면 나의 학력은 ‘대학원 석사’ 졸업이다. 학벌은 한국 사회에서 어느 대학교 학부 출신인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의 학벌은 ‘서울대’이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떤 계기로 나의 학력이 아닌 학벌을 알게 되었을 때, 질문의 레퍼토리는 대개 비슷하다. (요즘 학생들은 교사 이름을 구글링 하여 선생님이 어느 대학 출신인지를 찾아내기도 한다. 또는 항상 나보다 나의 학벌이 먼저 소문나는 학교라는 좁은 사회 집단의 특성상, 다른 선생님들에 의해 아웃팅(?)되기도 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또는 입을 틀어막으며, 또는 ‘헐’을 외치며)
쌤! 서울대 나오셨어요?
나는 살포시 미소만 보낸다. 첫 번째 질문에 “어! 나 서울대 나왔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 레퍼토리인 두 번째 질문에서 항상 말문이 막히기 때문이다.
쌤, 서울대 나왔는데 왜 우리 학교 같은 곳에 계세요?
10년 간 학교 생활을 하며 파악한 학생들의 질문의 의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아주 약간의 빈정거림이나 무시가 깔려 있는 어투로) 서울대 출신은 교사가 아니라 더 잘 나가는 직군(의사, 판검사, 변호사 등 전문직이거나 돈을 매우 매우 잘 버는 직종을 일컬음)에서 일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교사를 한다면 서울대 출신이니 더 좋은 학교(학생 입장에서 특목고 등을 뜻하는 듯하다) 가야 하지 우리 학교 같은 수준 낮은 학교에 있는가(본인을 뛰어나지 않다고 여기고, 학생이 학교를 다니는 시기는 학교에 대한 불만이 가득할 때이니 본인이 다니는 학교도 그저 그런 학교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으면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정치인, 연예인 등을 비롯하여 자기가 아는 서울대 출신 유명인이나 친구의 누나 또는 엄마 친구의 아들이 합격한 이야기까지. 그중에서 교탁 맨 앞에 앉은 학생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묻는다. “선생님, 서울대 가려고 공부 얼마나 열심히 했어요?”
초면이나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볼 때 학벌이라는 간판부터 보고 탄성한다. 지금과 다르게 한때는 이 대학 간판을 어떻게든 ‘세련되게’ 드러내고 싶어 안달 나기도 했다. 나는 도취했었다. 서울대가 곧 ‘나’이며 ‘나’가 곧 서울대인 줄 착각하고.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대학을 다닌 시기보다 대학 졸업 이후 시기가 더 길어졌다. 아, 뭔가 이건 아닌데. 고민과 괴리의 깊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자랑은커녕 입을 꾹 다물고 숨어버리는 나로 변했다. 서울대 출신인 나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항상 무리했다. 서울대 출신인 너는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무서운 눈초리에 위축되었다. ‘학문’과 ‘사회’는 다른 세계였다. 물론 학문 속에서 사회도 있고, 사회 속에서 학문도 있지만, 이 둘을 융통성 있게 건너지 못하는 나는 교직 사회에서 부적응자에 가까웠다.
임용 시험을 합격하고 교사가 된 인생의 두 번째 정점에서, 내리막길을 향하다 바닥까지 뚫고 들어간, 서울대 출신의 중등학교 교사로서의 10년 치 시행착오 및 실패담을 하나씩 정리해보자. 그리고 더 이상 주류 속에 속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이 아닌, 소중한 나의 삶을 살기 위한 지금의 노력을 하나씩 기록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