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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Dec 08. 2022

판게아

나의 세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통해 실제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가상 체험을 통한 경험이 직접적인 경험을 대체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상 체험을 통해 사람들은 본인이 속한 집단 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경험을 쌓기 위해 해외로 공부나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런 사람들과 달리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릴 때부터 여러 나라에서 거주해 왔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이 해외 주재원이셔서 같이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공부하러 간 "유학생"도 아니었고, 정착을 하러 간 "이민자"도 아니었다. 약 25년 인생 중 한국에서 거주한 건 도합 11년 정도라 전형적인 한국인은 아니지만, 한국은 내가 제일 오래 거주한 곳이자 돌아가고자 하는 곳이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한 곳에 국한되어 자란 것이 아니어서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 상태로 지내는 것이 익숙하다. 때때로 정착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한 곳에 묶여 있으면 몇 달 만에 답답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 거주했던 국가는 한국을 포함하여 여섯 곳이다. 제일 짧게 거주했던 곳은 아직까지 미국인데, 석사 과정을 마치면 미국에서 취직을 할 생각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한국을 제외하고 제일 오래 있었던 곳은 세 살 때부터 약 5년가량 살았던 호주다. 여섯 개의 나라가 많은 건 아니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살았는지 나열을 하면 사람들이 잘난 체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대략적인 느낌만 주기 위해 나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공개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의 요는, 내가 이러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나를 신기해하고, 또 나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아래에 보이는 지도는 '나의 세계를 지도로 만든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단순한 지도이다. 언뜻 보면 흔한 지도 같지만 이런 지도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내가 살았던 지역들만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로 따로 노는 땅덩이들을 그럴싸해 보이도록 맞췄기 때문에 실제 크기와는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내가 이 지도에 붙여준 이름은 "판게아 (Pangaea)"다. 처음에는 배경을 푸른색으로 칠했다가 붉은색으로 변경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냥 빨간색이 좋아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실제 판게아처럼 대륙을 둘러싼 바다보다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알아갈 미지의 땅들도 있을 거라 생각하여 땅의 끝을 연상시키는 바다색보다는 땅과 가까운 색을 택했다.


판게아


지도에는 내가 지어준 제목을 적어두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등 여러 가지 단서를 통해 그 사람에 대한 퍼즐을 맞춰나가는 것처럼 지도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실용적인 지도는 보는 사람이 단번에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잘 만든 지도지만, 이 지도는 실용적인 면보다는 나의 일부를 표현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해줄 지도이기 때문에 일부러 아무런 표기도 하지 않았다.


현대 예술 작품들은 작가들이 해석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경우가 많다. 이 지도의 창작자로서 나의 의도는, 나의 설명을 읽기 전 보는 이들의 자율적인 해석이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판단하는 행위와 아무 설명도 주어지지 않은 지도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다.




2016년 12월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 볼 수 있다. 그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영국을 처음 방문했다. 필기시험 이후 면접을 보러 학교까지 갔다. 그 당시 나는 나의 지도 교수님이 되실 분과 다른 교수님 한 분과 면접을 봤다. 교수님들은 여러 가지 지도와 그래프를 나에게 보여주시며 이 도표들이 해석해 보라고 하셨다. 그중 하나는 제목과 설명이 지워진 지도였고, 교수님들은 지도가 무엇을 나타내는 건지 맞춰보라고 하셨다. 대게 면접이 그렇듯,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 생각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제 나머지 자료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처음 보여주신 지도에는 나라들의 크기가 일그러져 있었다. 정해진 수치마다 영역을 다르게 칠하는 단계 구분도(choropleth map)의 형식이었고, 무엇을 나타내는지 가려놔서 볼 수가 없었다.


사실 면접 준비도 거의 안 했고, 아는 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패기만 넘쳤던 나는 그 지도를 보고 인터넷 사용하는 인구 비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나의 말을 듣고 교수님들이 의외의 답변을 들었다는 듯 흥미로워하며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물어보셨다. 나는 대충 한국하고 일본의 땅덩이가 심각하게 부풀려져 있는 것과 중국, 미국, 유럽도 상당히 큰 걸 보고 잘 사는 국가를 보여주는 지표일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교수님이 어느 정도 비슷한 결이라고 하셨는데 알고 보니 정답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에 비례한 지도였다.


그때보다 경험치가 많이 쌓인 현재의 나는 같은 지도를 보고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정답을 맞혔을 것이다. 지리라는 학문은 굉장히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학문이고, 현재 학자, 정치인, 기업인 등 다양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고 보는 분야이기 때문에 지리학과 교수님이 선정한 질문이라면, 쉽게 환경과 관련된 지도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순백의 뇌를 가지고 있던 나는, 이런 문맥을 생각하지 못하고 학교 교과서에서 본 인터넷 사용량에 대한 것이 떠올라 그러한 답을 내놓았던 것이다.


출처: https://www.metlink.org/resource/country-by-country-emissions-of-greenhouse-gases/


이처럼 사람이든 지도든 책이든, 겉표지만 보고 완벽하게 판단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을 했다고 꾸중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개인적으로 본인의 생각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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