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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송이 Nov 13. 2023

내가 읽는 세상, 내가 쓰는 세상

지금의 글쓰기

나는 나다.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학기 초, 환경 미화 숙제로 적어 낸 좌우명이다. 교실 뒤편 사물함 위 게시판에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붙었다. 각자 적은 문장도 같이 따라붙었다. 좌우명은 무슨 좌우명이냐며 ‘아 몰라. 그때그때 마음대로 사는 거지!’ 그냥 생각나는 말을 대충 적었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니 재미라도 찾고 싶었다. 괜히 비장한 목소리로 “나는 나다.” 한번 읽고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막았다.      


교과서를 넣었다 뺄 때마다 정사각형 사물함을 열고, 닫으면서 그 게시판에 꼭 시선이 닿았다. 친구들 건 기억 안 나고 내 것만 기억난다. 어느 날은 그 문장이 식상하고 창피해서 ‘정성껏 적을걸’ 후회했다가 어느 날은 그 문장을 보고 ‘그래! 나는 나지.’ 조용한 다짐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답게 살고 싶으면서도 공부를 잘하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몹시 구애받았던 학생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싫어했다. 그게 싫어서 혼자 부단히 노력하는 소녀였다.      


입시를 준비하던 때 선생님과 친구들은 “송이는 무조건 인 서울이지!”라고 입을 모아 응원했다. 결과는 아웃 서울. 수능 보기 전에 일찍이 대학교 한 곳에 합격했다. 5번째 논술 시험을 보는 날 직감했다. 한송이는 주입식 교육의 산증인이었다. 논술과 면접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교수님들은 교과서가 아닌 나만의 생각을 원했다. 배운 기억이 없어서 외워 간 말만 하고, 때로는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대학교 합격증을 받고도 계속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다 끝나고 보니 수험표가 18개쯤 되었다. 그러고 나니 ‘재수’를 권유받았다. 충분히 최선을 다했는데,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재수 없어~” “재수 없어요~”라고 말하고선 “용의 꼬리가 될 바에 뱀의 머리가 될 거예요.” 당찬 포부를 말하고 다녔다.      


대학 입학 후, 대학 생활을 신나게 하고 싶어서 학생회에 들어갔다. 학생을 위한 일보다 술자리가 더 많아서 1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그만뒀다. 선배들과 동기들은 그런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쉬워했다. “그만뒀어? 학생회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라고 묻는 말들이 재밌었다. 그리고 5년 전 다짐했던 ‘뱀의 머리’가 되어 졸업했다. ‘행정학과 수석 한송이’ 단상 위에 올라가 졸업장과 빛나는 우등패를 받았을 때 다 이룬 것 같았다. 그 쾌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으로 발을 딛기에 행정학과는 어정쩡한 전공이었다. 특색과 깊이가 없었다. 일반 기업에 가기도 애매했다. 공무원 아니면 공기업, 우리들의 진로는 둘 중 하나였다. 경찰, 군인 아니면 시청, 법원, 교육 공무원. 겪어보지 않고 그 길로 가는 게 싫었다. 동기들은 일찌감치 노량진으로 향했다. 나는 휴학을 선포했다. “휴학하게? 하루라도 빨리 노량진 가서 시간을 아껴야지!” 1년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쉬기도 쉬면서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진로 탐색기였다. 법원을 들락거리고 시청, 동사무소를 들락거렸다. 법원은 우울했고, 시청은 삭막했고, 동사무소는 물음표였다. 근데 일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휴학하고 돌아온 내게 교수님은 공무원을 추천했다. 시험도 잘 볼 거고, 공무원에도 인재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별다른 수가 없어 노량진으로 향했다. 한 강의실에 무려 500명이 앉아있었다. 연필을 끄적일 때 옆 사람 팔에 닿지 않게 팔꿈치 각도를 신경 써야 했다. 숨 막혔다. 히터 열기에 500인분 이산화탄소. 사막과 같은 메마름, 목마른 영혼들이 가득한 불모지였다. 맑은 생수를 마셔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깡생수를 들이켰다. 강의 열기가 최고조였던 어느 순간 “철컹!” 수험생을 가두고 있던 철문이 힘차게 열렸다. 한 여학생이 엉엉 울면서 소리를 쳤다. 울부짖는 소리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 조교들이 끌어내기 위해 애쓰고, 여자는 버텼다. 억울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상황 파악도 하기 전에 다시 철문이 굳게 닫히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열띤 강의가 이어졌다. 궁금했다. 계속 궁금했다. 충격이었다. 사람이 우는 데 아무도 다독이지 않는다. 웃고, 비웃고, 바라보고, 무관심했다. 그런 사람들 틈에 나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깊은 물속에 빠져 잠긴 것처럼 모든 소리가 웅웅 거렸다.      


그날 어떻게 집에 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울고 있는 사람을 다독여주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게 싫었다. 꿈속에서 철문이 계속 열렸다 닫혔다. 공무원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 볼 때 할 말이 없었다. 거짓말을 하기 싫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꾼이 될 수 없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꼬박 한 달, 학원을 허투루 다녔다. 찾았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고 싶었다. 학원에서도, 친구들도, 부모님도 아쉬워했다. “딱 6개월만 공부하면 붙을 것 같은데” “그래도 몇 개월 공부했는데 시험은 보지.”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다는 선택이 여러 사람에게 신기한 소식이었다. 남들은 돈 벌기 시작하는 나이에 돈도 쓰고 시간도 쓰면서 공부했다. 공무원을 안 하는 것도, 다른 전공을 선택한 것도, 대학원에 입학한 것도 신기해했다. 졸업 후 사회복지사도 했다가 높은 사람 비서도 했다가 다시 사회복지사로 일한다. 퇴사한다고 했다가 다시 일한다. 이 모든 길을 다 아는 친한 동생이 물었다. “이번엔 또 뭐예요?!” 이번엔 건축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다.     


해외 봉사로 라오스를 여덟 번 다녀오는 동안 그 돈으로 그 시간으로 다른 나라를 가보라는 무수한 조언을 외면했다. 스물아홉 살인데 아홉수니까, 이십 대가 아까우니까 내년에 결혼하라는 말을 뒤로하고 스물아홉의 나를 아름다운 결혼사진으로 기록했다. 결혼한 지 1년, 2년, 3년 지났는데 아이는 안 가질 거냐는 질문도 이제 아무렇지 않다. 남편 있는데 글쓰기도 하고, 콰이어 활동도 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런 염려나 시기, 질투에 “응! 좋겠지” 대답한다.      


사람들이 읽어 준 세상에 살다가 점점 내가 읽는 세상에 산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선택하다가 이제 스스로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산다. 현실적인 고려도 하긴 하지만 어제보다 오늘 더 그렇게 선택한다. 덜 신경 쓰고, 다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언젠가 그냥 던진 말이 씨가 되어 자랐다. ‘나는 나다’ 이 네 글자는 인생길에서 잎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고 있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눈과 비를 맞으며 뿌리가 깊어지고 있다. 그 나무 그늘에서 혼자 잠도 자고, 계절도 즐기고, 커피도 마시고, 글도 쓰고, 노래한다. 돈은 별로 못 벌어도 외로운 사람들과 모여 함께 웃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나로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그러다 다른 길이 보이면 다른 길을 가야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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