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 그의 삶에 관하여.
인도의 바라나시를 가보고 싶다.
어머니의 강, 갠지스 강이 흐르는 힌두교의 성지, 그곳은 생과 사의 혼잡한 경계를 경험할 수 있다.
힌두교인의 종착지는 갠지스 강이다. 그 강은 어머니의 강이기에 불에 탄 육체가 그곳에 뿌려지면, 그 고달픈 생의 경륜은 종착을 알리고 마지막 생인 그 육신의 영혼은 정화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갠지스 강은 수천 년 동안 죽음과 마주하는 강이다.
하루에 2~300 여구의 시신이 쉴 새 없이 타 사라진다. 180분, 수십 년을 견뎌온 육체는 찰나의 시간에 사라진다. 한 줌의 가루가 되어 흐트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죽음을 복되다고 여긴다. 시체를 운반하고, 장작을 사고, 유가족이 불을 붙이는 그 순간마다 죽음의 슬픔보다 정화될 영혼의 기쁨이 더욱 큰 것이다.
죽음을 경험해 본 기억이 있는가? 간접적인 죽음의 경험은 나에게 많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 특히 종교 지도자로 살아가면, 타인의 죽음에 깊게 관여할 수 있는 축복이 주어진다. 다양한 사람들의 장례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축복 중 하나이기에, 나는 수많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덕분에 임종과 위로, 입관, 발인을 동행하며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토록 수많은 죽음을 대면했지만 역시 인상적인 죽음은 사적 죽음이었다. 한 소년과 한 중년과 한 노년의 사람. 세 사람의 죽음은 나의 생각을 전복시키는 순간이었다. 그중에서 한 노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그를 우리 집에 모셨고, 함께 살았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그와 함께 살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늘 고령의 노인이었다. 사실 불만도 많았다. 그의 생이 얼마 남아 보이지 않은 덕택에 집안의 모든 일정과 계획은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어린 나는 놀이동산에 가고 싶었으나, 우리 집은 그를 위해 꽃놀이를 갔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어쩔 때는 그를 집에 두고 여행이나 외식을 나가기도 했으니.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가족은 그를 사랑했고, 그 역시 우리 가족을 사랑했다. 아니 그는 우리 가족이었다. 나의 가족은 항상 여섯 식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되짚어 보면 그는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던 것이 확실하다. 고령의 나이를 살아가는 그는 감히 내가 견딜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진 채로 세월을 겪어내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경기도 가평의 부잣집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만석꾼이었고, 덕분에 그의 삶은 윤택했다. 그가 학당에 다닐 때, 늘 머슴 등에 업혀 흙을 밟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위세는 상당했을 테다. 그러나 사촌의 보증 문제로 그 재산이 다 사라졌다. 지금은 왕국회관이 들어선 잃어버린 가평의 선산에는 그의 부모가 묻혀 있지만, 그 산은 타인의 소유가 되었다.
결혼 후에도 그의 삶은 퍽 기구했다. 홍가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 남자 역시 돈을 벌어볼 만큼 번 부자였다. 그러나 방조제를 지어 간척지를 매입할 요량으로 투자한 돈을 사기로 날려 먹고는 동네 목수로 전락해 버렸다. 돈다발을 싸들고 정착한 그 가족들은 지금은 미국이 되어버린 마을에 남은 돈 하나 없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마을에 정착해도 그의 기구한 삶은 이어졌다. 남편은 계집질을 하기도, 술에 취해서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물론 악의가 있다거나 그의 남편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막내딸에게는 한없이 넓은 사랑을 보여주기도 했으니. 그저 그 시대상이 그러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한 시대에 기구한 그의 삶,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독재정권, 민주정권까지 그는 역사 속에서 꿋꿋하게 버텼다. 그리고 그의 참혹하고 기구한 삶은 세기를 넘어 2019년 여름이 되어서 멈추었다.
으레 그렇듯 그는 이른 시간에 잠을 청했다. 유일한 벗인 티브이를 끄고 잠에 든 지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집에 돌아온 그의 딸이 주무시는 그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그가 의식을 잃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막내딸은 울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손녀가 달려왔고, 구급차를 불렀고, 동행했다. 그의 산소포화도는 죽기 직전의 수치를 보였고, 상태를 확인하자, 그를 제외한 구급차 안의 모든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곧 병원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회복했다. 비록 병원 살이었지만 어렵게 생을 이어갔다. 간병인을 쓸 돈을 줄 수 없다는 오빠들의 말에 막내딸은 간병인 역할을 하며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몇몇 딸들과 아들이 이따금씩 얼굴을 비추었다. 딸의 딸 역시 간호사로서 그를 돌보았다. 그나 어머니가 자리를 비울 때면, 아버지와 나, 동생이 순서에 따라 간병인 역할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초여름에서 늦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푸른 잎이 완연하게 생기를 뿜어낼 그 시점에 그의 병세도 호전되어 재활의학과로 옮겨졌다.
목요일이었다. 그날의 당번은 나였다. 그날 나는 대전에서 올라왔고, 그와 함께 했다. 며칠 전부터 그는 상태가 조금씩 좋지 않았다. 그는 계속 복통을 호소했다. 의사에게 물었지만, 진통제를 투여할 뿐이었다. 의사도 나도 그리 위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다음날이 되어 그는 처치실로 향했다.
장폐색이었다. 장으로 가는 혈관이 막 한 것이다. 피가 통하지 않아 장의 일부가 죽었고, 당장 어디가 막힐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황이 되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인데, 고령의 나이이기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의사가 말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수술을 하서 회복될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그러나 수술을 하지 않으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가족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작은 숫자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조차 취하지 못한 채로 열었던 배를 다시 닫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틀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슬픈 일이었다. 나는 그와 거진 평생을 함께 살았다. 그가 해주는 밥을 먹고 그의 잔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당연하게도 슬펐다.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가족들이 모여 그와 함께했다. 그는 코와 입에 호흡장치를 붙인 채로 숨을 쉬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멈추었다. 의사는 날자와 시간을 나지막이 이야기하고 사망을 선고했다.
의료진은 가족들을 잠시 밖으로 보낸 뒤, 장치들을 떼어냈다. 그리고 온전한 모습의 그와 마주하게 도와주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의 감정은 독특했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온전히 받아졌다. 평온하게 누워있는 그를 보며 다른 이들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흐느끼는 그들 사이에서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가 이제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그를 볼 때, 나는 슬픔이 사라졌다. 그의 삶이 투영되는 그 살결 위 흔적들이 그가 영면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죽음은 지나간 그의 고통을 멎게 해주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 마음이 온전히 와닿을 때, 나는 마냥 슬퍼할 수 없었다.
그의 삶을 나열할 때, 그 무게는 오랜 시간임에 틀림없다. 난 그와 같은 나이를 맞을 수 있을까? 의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오래된 삶은 매우 기구했다. 한 줌 재가 되어 버릴 그 오랜 시간들은 퍽 기구했다.
바라나시의 화장터는 오늘도 불타고 있다. 인간은 태워져 흙이 되고 어머니의 강으로 흘러간다. 살아가는 자는 그 물을 마시기도, 그 물속에서 수영하기도, 그 물 가에서 빨래를 하기도 한다. 죽은 자의 재를 온몸에 바르고 죽음을 기억하며 수행하는 이들도 있다. 매일 저녁 기도하는 마음으로 축제 같은 의식을 드리기도 한다. 소원을 담아 물에 연꽃을 띄우기도, 물에 몸을 담그며 기도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곳에 가고 싶다. 기구했던 나의 할머니를 위해. 종교는 다르지만, 그를 위해 한 줌 재가 되어 볕이 좋은 곳에 묻힌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다. 나의 기도가 할미에게 다다를 때, 나는 그와 대면하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