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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희 May 19. 2023

[뮤지컬] 영웅: 영웅이기 이전에 사람, 안중근

그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지 않았던 우리의 영웅 안중근

  뮤지컬로 역사 이야기를 했을 때 좋은 건 뭐가 있을까. 아마 우리가 단지 영웅의 이야기로만 치부하고, 혹은 나와는 너무나도 먼 얘기라고 느끼던 것들도 좀 더 나와 같은 인간의 차원에서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안중근 의사가 엄청난 일을 했다는 그 사실만을 알고 있던 이에게, 안중근도 사람이었고 그도 두려움을 느꼈음을.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한 일이 얼마나 그에게 무서웠던 것임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출처: ACOM

 첫 곡이었던 단지동맹. 안중근 의사를 포함하여 그 곁의 모든 독립군들의 두려움과, 그 두려움만큼 컸던 투쟁을 향한 결의가 그 한 곡을 통해 드러났다.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차 떨리는 손 끝과 대비되는 흔들림 없는 눈빛. 그게 모든 걸 보여줬다. 두렵다. 하지만 우린 해낸다.


 대극장 뮤지컬인 만큼, 화려한 무대와 앙상블들의 군무가 눈에 띄었다. 특히 독립군과 일본 순사 간의 추격전이 펼쳐질 때 격한 안무와 급박함을 드러내는 군무. 한정된 공간을 만주의 거리로 확장시키는 무대와 다층의 구조물. 그 구조물들 사이를 미친듯이 뛰어다니는 모든 사람들. 한정된 공간을 한정되게 확장시켰고, 그래서 그 급박감과 긴장이 더 잘 느껴졌다. 아이다를 볼 때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앙상블들의 군무가 만들어내는 감정. 춤을 통해서도 감정이 느껴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체감했는데, 오늘 또 한 번 느꼈다. 긴장감과 급박함이 손끝까지 전해졌다.


불필요한 러브라인은 줄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경과 연대, 그리고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집중한 서사였다. 영웅도 사람이었음을 이것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영웅은 비단 안중근 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자신의 책을 쓰고 있는 영웅이었다.


출처: ACOM

 장부가, 누가 죄인인가, 십자가 앞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의 장부가. 이 모든 노래를 통해 안중근의 뜨거운 결의를 느낄 수 있었고 그 이면의 두려움과 절망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의 장부가에서 안중근은 그의 모든 힘을 쏟아 장부로서의 다짐을 내뱉는다. 눈에선 눈물이 흘렀지만 결의에 가득찬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정말 커다란 힘이 느껴졌다. 한 사람이 저렇게까지 단단할 수 있구나. 그 단단함으로 주위 사람들을 움직이고 또 움직이게 했겠지. 저런 사람이라면 나도 곁에서 믿고 따르고 존경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만큼 멋진 사람이었다. 그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지 않는다는 면에서도 더욱 멋진 한 사람이었다.


 앞서 언급한 추격 장면,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 공간, 그리고 마지막 안중근의 옥사. 앞선 두 가지는 무대를 특정 공간으로 꽉 채워 무대가 가지고 있는 공간의 제약을 벗어던진 장면이었다. 무대 위 공간은 만주가 되었고 기차가 되었다. 다양한 기술을 이용해 영화처럼 마치 그 장소가 진짜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안중근의 옥사 장면은, 무대 위 공간이 여백으로 가득했다. 그의 책상이 있었고, 붓이 있었고, 종이가 있었으며 안중근이 있었다. 앞선 장면들에선 다양한 요소로 무대가 꽉 채워져 실제감과 화려함을 선사했다면 이 장면은 여백을 남겼다. 그래서일까 이 대조적인 장면에서 안중근의 마지막에 더욱 깊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백 속에서 그의 결의만이 홀로 남았다.


출처: ACOM

 공연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많은 매체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역사를 다룬 뮤지컬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역사를 조금이나마 쉽게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것.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에서 그 이야기에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우리의 이야기에 점차 관심이 적어지는 현 시점에서 역사 뮤지컬의 역할은 점차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로도 개봉해 많은 대중들에게 다가갔던 <영웅>이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여러 제약으로 인해 완벽한 역사 고증은 어렵겠지만, 그것에 치중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물론 좋은 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일제강점기라는 큰 역사적 사실을 단 세시간에 줄이다보니 비약적인 설명이 많았고 소모적으로 이용되는 캐릭터도 있었다. 더하여 실화를 바탕으로 하다 보니 보통의 뮤지컬들이 가지고 있는 극적인 서사라던가 드라마틱한 요소는 다른 블록버스터급 뮤지컬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이 뮤지컬의 의의는 물론 우리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려는 것도 있지만 우리에게 한 사람 안중근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가상의 인물들을 통해 안중근의 인간다움을 여실히 보여줬고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영웅을 보고 나서, 영웅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던 안중근의 삶에 조금이나마 귀기울이게 되었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본다.


공연기간: 2023년 3월 17일 ~ 2023년 5월 21일
공연장: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러닝타임: 160분
제작사: 에이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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