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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Nov 30. 2022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하고

워킹맘 생존기


분명히 눈을 떴는데 여전히 짙은 어둠 속이다. 

아직 밤인가?

스스륵 저절로 다시 감긴 눈꺼풀은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힘겹게 꿈틀댄다. 아침마다 눈치도 없이 흥겨운 건 알람 너뿐일 거다. 활기찬 그 소리를 끄고 나니 적막함이 감돈다. 아마 오늘 하루 유일하게 느끼는 이 짧은 적막함이 사무치게 그리울 것으로 예상된다.


엄마를 닮아 아침잠이 많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그래, 너라도 엄마 대신 좀 더 자렴.' 하고 소소한 모성애를 뿜어댄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의 다리와 엉덩이를 들썩이며 옷을 입히는 것쯤은 이제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 나는 달콤한 아침잠과는 이별한 ‘워킹맘’이다.


자는 아이를 들춰 안아 올리는 순간, 내 불길한 예감은 왜 오늘도 빗나가지 않는 것인가.

너에게 꿀잠을 양보했건만 돌아오는 건 사랑스러운 너의 지랄발광이로구나. 온갖 짜증과 분노의 포효를 뿜어내는 작은 너를 카시트 감옥 안에 가둬두고 재빨리 차문을 닫았다. 울음소리는 멀어졌고, 아이는 눈치라도 챈 듯 더 악을 쓰며 보답했다.


아뿔싸. 뒤에 한 놈이 더 있었다. 연년생 육아는 내 인생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스토리였다. 두 아이를 태운 차는 마치 자동화 시스템처럼 매일 같은 길을 지겹도록 가고 있었다.


팅팅 부은 눈, 푸석거리며 갈라지는 피부가 작은 룸미러 속에 적나라하게 비친다.

바쁘게 화장하는 손과 신호등이 바뀌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초초한 눈동자보다 더 바쁜 건 입이었다. 흘러나오는 동요를 힘차게 따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만이 다행히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했다. 물론 마스카라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도 종종 서러움의 땀방울은 흘러내렸다. 나약한 엄마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수록 더 크게 부르는 아이의 노래인지 발악인지 모를 그 행위는 지독히도 슬펐지만 다행히 아이는 해맑게 좋아하는 메뉴를 고르듯 다음 노래를 주문하고 있었다.


아직 출근도 안 했는데, 나의 체력은 이미 이곳저곳으로 쏟아져내려 바닥이었다.

2년 약정 지난 낡은 휴대폰 배터리처럼 아무리 충전해도 시원치가 않았다.  

전쟁처럼 아이는 등원, 엄마는 출근 결승선을 가까스로 통과했고 정글 같은 그곳에 우리는 함께였다.




나의 직업은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온종일 아이들과 함께하는 ‘10년 차 보육교사’다.


아이와 나는 각자 다른 공간(교실)에서 서로의 일과에 충실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순간마다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아이는 양팔을 벌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에게 안기고 싶은 아이도, 매번 그 사이를 갈라놓아야 하는 아이의 선생님도 힘겨워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약’이라고들 이야기했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시간들이 모이면 단단한 마음의 방패라도 생겨나는 걸까? 그러나 그저 무거운 돌덩이만 내려앉았고, 갈수록 더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세상 모든 워킹맘이 이런 걸까? 행여 세상 모든 워킹맘이 그러할지라도, 아니 이보다 더할지라도 이제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 출근과 동시에 사직서를 던져두고 아이가 좋아하는 키즈카페를 가기로 한다. 한껏 신이 난 아이를 향해 눈을 맞추며 가끔 온화한 표정을 지어주고,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며 여유롭게 앉아 있는 달콤한 상상에 쓴웃음이 난다.




 빌어먹을 이놈의 직업은 사직서를 쓰려면 다음 담임교사가 준비되어야 하고, 반 아이들 학부모에게 일일이 알려야 하며, 쓸데없는 서류들을 끝내야 했다. 그 외에도 마무리해야 할 일이 120개쯤은 더 있었다. 중요한 건 지랄 맞은 나의 책임감이 꼭 이럴 때 정의로운 척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1년은 버티고 우리 반 아이들 졸업은 시켜야지. 교사는 그럴 의무가 있고, 나는 그 의무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반 아이들은 한없이 사랑스러웠고, 또 다른 에너지를 채워주는 존재들이었다. 퇴사를 마음에 품고도 막상 학기말이 되면 너희들과 어떻게 헤어지냐며 꺼이꺼이 통곡하는 주책맞은 교사였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이 직업이 천직이라 말했지만, 혼란스러웠다. 수많은 아이들의 돌봄과 행복을 위해 일을 하면서, 내 아이 하나의 행복은 지켜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나를 괴롭게 했다.




다행히 아이가 마주쳐도 울지 않을 때쯤엔 “엄마”라고 목 놓아 부르기 시작했다.

기차를 삶아먹은 듯한 우렁찬 목청 역시 나를 닮았다. 아이가 부를 때마다 콩알 같은 반 친구들은 귀엽고 동그란 눈을 부릅뜨며 쪼르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만인의(?) 엄마가 되어있었다.

“어린이집에서는 엄마 말고 선생님이라고 불러보자.” 담임선생님은 아이들 사이게 벌어진 작은 혼란을 잠재우려 했다.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혼란은 어찌해줄 도리가 없었다. 아이는 어떤 날은 ‘엄마’ 또 어떤 날은 ‘선생님’이라고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인지 선생님인지 모를 아리송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아이는 우연히 ‘엄마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아이의 귀여운 실수였지만 꽤나 좋은 대안이었다. 그 이름은 너와 나의 정글 속 또 다른 애칭이 되었고, 행여 친구들이 따라 부른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꽤 매력적인 절충안의 단어였다.

나 역시 ‘엄마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소중한 너에게 엄마도 선생님도 되어 줄 힘이 갑자기 생겨났다.




사진출처: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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