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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Jan 16. 2023

8. 산지해장국, 세화해변, 마레1440, 도도톳김밥

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8) 세화, 폭풍 같았던 바다(230116)

제주에 내려온 날 이후로 항상 아침은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평소엔 쉐이크 하나 달랑 타먹고 출근하느라 바빴는데 여기에서만큼은 그렇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늦잠을 늘어져라 자도 아침밥은 집에서 제대로 챙기면서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아침을 밖에서 먹기로 했다. 숙소 근처에 유명한 해장국 맛집이 있는데 거긴 오후 3시에 문을 닫기 때문이다. 오전에 밖을 나서면 저녁이 되어야 돌아오는 나에게 이 집 해장국을 맛보려면 첫 끼를 그곳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커피부터 한 잔 마셨다. 공복에 커피가 좋진 않지만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밥 먹을 텐데 괜찮겠지?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후 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해장국집은 숙소에서 도보 10분 거리 안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미 걸어갔을 때부터 가게 앞 주차장이 만차였다. 아직 점심시간 때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갔는데 벌써 만석이란다. 대기하려면 칠판에 이름과 인원수, 메뉴를 쓰라고 하셨는데 내 이름을 쓰자마자 단체손님들이 우르르 차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바로 쓴 것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름이 불렸고 곧이어 미리 주문한 내장탕이 나왔다. 우선 건더기가 정말 많았다. 양과 곱창, 우거지가 주재료였는데 다른 건 몰라도 양이 정말 많이 나와서 먹어도 먹어도 끝나지 않을 정도였다. 해장국은 좋아하는 편이어서 어딜 가나 밥에 건더기는 다 먹고 나오는 편인데 여기는 건더기를 겨우 먹고 밥을 남길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곱창은 조금 작고 곱이 적은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내탕장에 구색을 맞출 정도는 되었고 우거지는 독특했다. 우거지는 연한 잎을 써서 그런지 색도 연해서 내가 생각하던 짙은 색의 우거지가 아니어서 비주얼이 신선했지만 맛이 좋았다.

산지해장국 서귀포점 내장탕. 가격은 11000원이고 메뉴는 소고기 해장국과 내장탕, 단 두 가지. 찐맛집의 기운이 느껴진다.


만족스러운 첫 식사를 마치고 터미널로 향했다. 오늘은 동쪽바다인 세화를 가볼 생각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급행버스가 곧 출발 예정이었다. 바로 잡아타고 세화까지 편안히 도착했다. 세화해수욕장까지는 도보로 10분 정도 걸으면 도착했는데 군데군데 아기자기한 소품샵이나 카페들이 눈에 띄어 참 귀여운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귀여운 거리에 그렇지 못한 바람이 매섭게 불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제주의 바람을 맞으니 처음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겨우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더 큰 바닷바람을 맞아야 했다. 기온이 영상임에도 매서운 바닷바람에 중심을 잡고 서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기대하던 바다가 여기 있는데 포기할 순 없지. 에메랄드빛과 네이비가 섞인 세화의 바다에 조금 더 다가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폭풍과도 같은 바다의 소리를 들으며 녹음을 시작했다.

세화해수욕장의 첫 이미지. 사진으로는 온화한 파도처럼 보이지만 파도소리는 내가 들었던 그 어떤 파도소리보다 우렁찼다.


제주 여행을 시작하면서 사진과 함께 바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녹음을 시작했다. 중문을 제외하곤 지금까지 다녔던 바다의 소리를 다 녹음했는데 별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글로 남기는 것보다 좀 더 풍성한 기록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렇게 번거롭게 사진 따로, 녹음 따로 할 바에야 영상으로 남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소리가 주는 기록은 그만의 매력이 있다. 소리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들으면 영상은 나의 상상 안에 자동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나의 상상보다 더 뛰어난 영상을 나는 지금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내 상상을 위해 소리를 기록해두고 싶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소리는 처음이었다. 집채만 한 파도도 아닌데 어쩜 소리는 이렇게 우렁찰 수 있을까. 온화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반전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에게 바다란 모두를 품어줄 것 같은 넉넉함과 평화로움, 온화한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바다란 언제든 인간의 목숨쯤은 단박에 날려버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인간은 바다와 투쟁하며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항해하는 존재들이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화해수욕장은 해변가를 따라 걸을 수도 있지만 바다 안으로 잠깐 들어갈 수 있는 샛길도 있었다. 샛길로 바다에 다가갈수록 인간은 먼지 같은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오늘 내가 만난 세화는 바로 이 소설이 떠오를 정도로 두렵고도 무서운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온화한 모습이었기에 더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몰아치는 파도소리, 그리고 모래바람이 온몸을 때리던 순간들. 아마 나에게 세화해수욕장은 반전의 이미지로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을 것 같다.


그렇게 무서운 바람을 헤치며 두 시간을 걸었다. 워낙 걷는 데엔 도가 터서 두 시간 정도면 그냥 좀 걸었네? 싶을 정도인 나지만 세화의 바람이 워낙 거칠었던 탓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몸도 녹이고 가져온 책도 읽고 싶었다. 해변가를 따라 보이는 카페 몇 군데를 돌다가 오션뷰 자리가 비어진 카페 한 군데가 보여 들어갔다. 카페 마레1440이었다. 이곳은 오션뷰와 커피 모두 좋았지만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건 BGM으로 선정한 재즈곡들이었다. 쳇 베이커의 'But not for me',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That old feeling'이 연달아 나오는데 마음속의 전율이 일었다. 내 최애들 중 하나인 베이커 아저씨를 세화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벅찬 마음이 들었다. 

마레1440에서 주문한 아메리카노와 함께한 독서. 처음엔 1층인 이 자리에서 읽다가 나중엔 2층으로 올라갔다.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어서 2층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귀와 눈이 동시에 호강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벌써 시간은 저녁 5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해장국 말곤 먹은 게 없던 터라 일단 끼니부터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페와는 도보 5분 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분식집으로 향했다. 사실 난 물 없인 살아도 떡볶이 없인 살 수 없는 인간 떡볶이다.(언젠가 브런치로 떡볶이 리뷰를 정리해볼까 싶은데 그 많은 집을 다 정리하려니 벌써부터 까마득하다) 그런데 제주에 내려온 이후 떡볶이를 한 번도 안 먹은 게 생각나 분식집을 본 순간 바로 이곳이다!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치즈 떡볶이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곧 내 눈앞에 떡볶이가 차려져 있었다. 너무 풀어지지 않은 떡의 식감과 어묵의 조화가 좋았다. 센스 있게 계란도 하나 앉아있었다. 너무 오랜만의 떡볶이 영접(...)이라 조용히 폭풍먹방을 찍고 있는데 사장님께서 튀김만두를 깜빡하셨다며 추가해 주셨다. 떡볶이 국물에 만두를 비벼 먹으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제주에서 먹은 첫 떡볶이. 떡볶이는 언제나 옳다. 반찬의 양은 내가 적게 먹어서 조금 퍼온 것. 사장님께서는 반찬에 인색한 분이 아니시다.


그렇게 천국을 살짝 엿보고선 정신을 들어보니 벌써 세상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버스를 타려고 해녀박물관쪽으로 걸어 나오는데... 세상에나. 오늘은 휴관일이었구나. 사실 꼭 갈 생각은 없었지만 시간이 가능하면 들를 생각이긴 했는데 휴관이니 어차피 못 가는 곳이었구나 싶어 빠르게 단념했다. 그리고 10분쯤 기다렸을까? 버스가 도착했고 무사히 숙소로 도착했다.


오늘의 반전매력이 넘쳤던 세화의 바다는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이틀 연속으로 모래바람을 선사해 준 제주의 바다.. 내일은 다 좋은데 모래바람만 없었으면 싶다.

맞아. 제주에 오길 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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