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xx일
복잡한 생각이 든다. 이럴 때는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듯 민준은 글을 쓴다. 그 글은 때로는 일기이고, 때로는 수필이며, 때로는 소설이다.
어느 날 그는 직원 화장실에 앉아서 꽉 찬 잡념에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오래되어 물 빠진 글씨로 명언이 적혀 있었다. "인생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 난 의미 있는 결과물을 원하지만, 그런 재능보다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남았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은 없었다. 그래, 차라리 생생한 글이라도 써야지. 이 욕망은 동굴 천장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생생하고 축축한 글로 나를 이끌기를 희망한다.
"속이 답답하고 미치겠다. 어찌해봐라."
어느 시골 폐교에 듬성듬성 난 잔디처럼 찌든 머리를 한 수형자가 나를 꼬나봤다. 연기자는 대단하구나. 독방에서 수형자가 연기하는 것을 보니 새삼 그들의 대단함을 깨닫게 된다. 눈을 부릅뜨고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지만 몸의 생기는 오히려 나보다 넘쳐 도무지 속아 넘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나, 어쩌겠나, 그저 절차가 있으니 혈압을 측정하고 혈당까지 체크한다. 역시나 지극히 정상. 오히려 나보다 혈압도 낮고 건강하다.
"정상이네요. 혈압도 혈당도 다 괜찮고 이전 이력에 병도 없네요."
보통 이럴 때 그들에게는 만능어가 있다, 공황장애, 그 카드를 꺼내 들겠지? "공황장애야. 답답해 죽겠다. 어찌해 보소." 역시나 같은 시나리오. 그는 존칭도 없이 바로 반말이다. 중점관리대상, 1004 장한국(가명), 사형수를 뜻하는 빨간 명찰을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달고 오늘도 그는 이렇게 무료한 하루를 보내려 한다.
(*1004 장한국은 실제 번호와 이름이 아님을 밝힙니다.)
1실에서 그는 소리를 지르며 자꾸만 근무자 벨을 눌러 된다. 오늘만 해도 5번째. 비상벨만 2번을 눌렀다. 갇혀 있는 그 문 앞에 서서 나 또한 갇혀있는 기분이 들었다. 난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1실 앞에 발이 묶인다.
"장한국 씨. 반말은 하지 마시고요. 아까 의료과에서 왔다 갔잖아요. 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무엇을 하겠어요?"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만 결과는 안다. 그는 진실이 필요한 게 아니다. 진실된 거짓을 원할 뿐. 그러니 내 말을 수긍할 리가 없지. 오직 기도하듯 요구사항만 늘어놓는다.
"응. 그 사람 돌파리야. 이렇게 아파죽겠는데 괜찮다는 게 말이 되나. 진짜 머리를 빠개고 싶네."
빠개고 싶은 게 자기 머리인지 타인의 머리인지 모르겠지만 계속된 열연에 정말 얼굴이 빨개져 빠개질 것 같이 보인다.
오늘은 운이 나쁘구나. 선풍기도 없는 복도 사각지대에 서있으니 등 뒤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처서가 지났지만 유난히 더웠던 여름은 여운이 길어 그 긴 햇살을 아직 남겨놓은 듯 나를 함께 괴롭히고 있다.
한참을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장한국은 벌떡 일어나서 재차 비상벨을 눌렀다. 저 멀리 통제실까지 불빛이 울려 퍼졌다. 계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냉기가 빠진 에어컨은 땡볕에 부채를 부치듯 애매한 열기만 토해냈다.
나는 낡아빠진 근무자실에 앉았다. 화장실도 없는 이곳은 어쩌면 또 하나의 독방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어제 운동을 시킬 때 수형자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교도관도 반은 감옥살이하는 거 아이가. 난 부정할 수 없었다.
나와 장한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퇴근을 하니까 괜찮은 것일까?
그러면 출근해서 있는 지금, 놀고 있는 장한수와 휴대폰도 반납 당해 그에게 구속된 나. 누가 자유를 박탈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교도소라는 곳은 가장 화려한 어둠이다. 사회면에서 매일 올라와서 시끄럽게 세상을 울리던 이들은 교도소라는 곳에 들어오면 큰 어둠에 삼켜지듯 세상의 관심에서 사라진다. 어찌 보면 판결은 순간이고 더 중요한 것은 이후다. 범죄는 영화가 아니다. 끝나면 엔딩을 보며 인상 깊었다, 가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사람들은 사형을 선고받으면 정의의 종결이 이루어졌다 생각한다. 재판을 받을 때 한창 터지던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그들에게 어둠은 때로는 다른 안락함이 된다. 뭐 할 말은 없다. 나도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랬으니 말이다. 거창하게 말해도 이것은 진작 말했듯이 그냥 풀어내는 욕망일 뿐이다.
나는 컴퓨터에 올려진 그의 사건 개요를 다시 봤다. 연쇄 살인. 읽기도 싫어지는 내용이 딱딱한 글씨체로 별 일 아닌 것처럼 적혀있다.
그조차 외면해야 한다. 내가 요즘 하는 주된 일은 감정을 버리는 일이다. 피해자를 생각하면 이렇게 세상의 담이 쳐진 곳에서 설치는 장한수를 어찌 볼 수 있겠나. 그는 여기서도 법을 파괴하며 자유롭지만 오히려 내 제복은 감정을 버리고 규정에 구속된다. 이 모순적인 간극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단면일 게다.
이미 오랜 수형 생활로 빵잽이가 된 장한국은 잘못된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아슬아슬 한 경계에서 오늘도 놀고 있다. 뭐 그런 것 있지 않나. 나는 수형 자니까 네게 욕하지만 네가 욕만 해봐라. 바로 고소, 진정, 인권이다. 이런 놀이다. 난 사회에서 친구들 진상 고객 이야기를 들으면 때로는 무덤덤해질 때가 있다. 사형수의 진상은 어떤 모습이겠나. 같은 수형자도 혀를 내두르는 모습은 아마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선을 넘는다.
며칠 전 있었던 진상이 이야기나 하나 해볼까. 한 수형자가 하루 종일 직원에게 소리 지르고 물건까지 부수다 보호장비에 꽁꽁 묶인 채로 그가 말했다.
"오늘은 내가 졌다. 내일 보자."
처음에 그 말이 무엇인지 직원들은 몰랐지만 다음 날 확실히 알게, 아니 보게 되었다. 건강 확인을 위해 가까이 그 수형자에게 가자 자신의 팬티에 싸두었던 대변을 손으로 투척했다. 그 수형자는 야구에는 재능이 있던 듯 정확한 제구력으로 직원의 얼굴에 적중시켰다. 이 한 수를 위해 자신의 팬티에 싸서 견딘 인내력과 자기 손도 희생하는 살신성인의 정신. 이 정도는 되어야 진상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교도관에게는 솔직히 이런 진상이 낫다. 장한국처럼 선을 지키며 계속 괴롭히는 수형자가 더 힘들다.
그래도 덕분에 피곤해서 집에서 잠은 잘 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