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온 지 벌써 3년째다. 동네에 아는 엄마가 많아졌다. 맛집과 핫플레이스를 잘 아는 엄마, 요리가 즐거운 엄마, 자신의 일과 회사가 가장 중요한 엄마, 어린아이 쫓아다니기 바쁜 엄마, 교육에 열을 올리는 엄마, 봉사활동이 삶의 낙인 엄마, 발레, 미술, 음악... 취미 부자인 엄마.... 각자 저마다 즐거움과 우선순위가 명확해 보인다. 그들은 본인이 즐거워하는 곳을 자주 찾고 재밌어하는 사람과 만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러 어디로든 향한다.
나는? 나는 현재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것을 할 때 즐거움을 느낄까?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한국에서 나의 즐거움은 그 좋아했던 골프장도 아니고 요리하는 주방도 아니다. 간혹 뒷 이야기가 궁금해 소파에 발 뻗고 누워 시리즈물을 보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허무함이 밀려온다. 주인공의 이름도 인과관계도 기억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평일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 홀로 한쪽 구석 앉아 책 읽는 시간이 잠시 쉬었다가 또 놀았다가 하는 힐링 시간이다. 식탁 한편 내 의자. 이곳이 지금 나의 놀이터가 아닌가 싶다.
그러다 문득, 나의 놀이터 클럽 플라니시에가 그리워졌다. 페루에서의 삶은 적응을 하면 할수록 매우 단조로웠다. 치안이 좋지 않기 때문에새로운 곳을 가려면 항상 용기가 필요했다. 차는 안전한 곳을 찾아 주차해야 도난 위험이 덜하고, 길을 지나다닐 때 가방은 꼭 두 손으로 잡고 다녀야 했다. 구시가지 센트럴 구경을 가려면 2명 이상 뭉쳐 다녀야 안전하다고 했다. 여러 가지 위험을 안고 다니는 너무 튀는 동양인이었다. 마음에 맞는 아이친구 엄마를 사귀기에는 나와 다른 생활습관과 페루 상위 계층이었고, 그들의 스페인어는 매우 빨라 알아듣기 어려웠다. 간단한 의사소통에는 문제없지만, 대통령을 욕하고 정치인을 비판하고 그들의 관심 분야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기에는 언어의 실력도 자신감도 한참 모자랐다.
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땐 그랬다.
외로움과 허전함을 채울 수 있었던 나의 놀이터. 컨츄리 클럽 라 플라니시에 <Country club La planice>.
페루에서 4년 반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냐고 묻는다면 딱 두 가지다. 첫번째는 마트 가서 장보고 집에서 요리(밥 하기)하기. 두번째는 클럽에서 골프 치기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아이들이 등교를 하면 나는 매일같이 이곳을 찾았다. 골프장만 있는 것은 아니고 수영장, 헬스, 놀이터, 미용실, 레스토랑, 카페, 테니스, GX, 요가, 줌바, 아이들 태권도, 로보티카, 아크로바틱, 미술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다. 오전에 골프를 치고, 오후에 아이들과 다시 돌아와 수영, 테니스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일과였다. 내가 사는 집 말고 페루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함을 느낀 곳이다.
카페 이리스 (Cafe Iris)
그녀의 이름은 이리스(Iris)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카페 이리스다. 클럽에 쫙 깔린 푸릇푸릇한 잔디밭보다 어쩌면 그녀의 야외 카페에 앉아 맥주 한 병, 커피 한잔을 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아침밥도 안 먹고 막히는 길을 뚫고 40분 넘게 달려 도착했다.
"Iris! Iris!" 카페 안쪽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그녀를 부른다. 환한 얼굴로 인사를 나눈다. 처음 그녀의 이름을 몰랐을 때는 그녀가 나를 세뇨라(señora : 부인, 여성을 높이며 부를 때 쓰는 말)라고 부르니 나도 세뇨라라고 불렀다. 언제부터인가 출근 도장 찍듯 클럽에 매일 오니, 그녀가 나의 이름을 물었다. 그 뒤로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내 이름을 불러줬다. 나 또한 그녀를 이리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여기 사람들처럼 말이다. 주문을 하면서 이런저런 짧은 대화를 한다. 어버버 한 나의 스페인어에도 편안하고 친근하게 대해주는 그녀가 좋았다.
"트리플레(페루식 샌드위치) 하나, 커피 한잔이요"
그녀가 만들어준 커피와 트리플레를 먹으며 플라니시에를 잠시 바라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고요하다. 셰뇨르(señor: 영어로 Mr. 일반 남자를 부르는 말)가 잔디에 물을 뿌리는 소리가 시원하다. 밤사이 야외 수영장 물에 빠진 벌레, 나뭇잎을 기다란 잠자리채로 건져 올리는 셰뇨르를 보며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바닥에 사람들이 먹고 흘린 음식을 주워 먹는 새들도 보인다. 평화롭다. 투명한 창 밖을 바라보며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흘리는 사람들. 새벽부터 깐차(잔디밭)에 나와서 18번 홀 퍼팅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 뒤를 따르는 캐디들. 잠시 후, 저 멀리서 오늘 나와 함께할 골프 친구들이 온다.
"올라! (Hola, Haemi! como estas!)" 볼 뽀뽀 인사를 하고 그녀들도 이리스를 부른다. 삶은 달걀 2개와 바나나를 시킨다. 깐차에 나가 전 이리스에서 보내는 잠깐의 시간이 마음의 긴장을 풀어준다.
시간이 되었다. 나의 캐디백을 가지고 기다리는 캐디와 만날 시간이다. 1번 오요(hoyo1, 1번홀)에서 힘껏 드라이버 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