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관하여

6

by 남킹

“....”

그녀가 뭐라고 말을 했다. 버스 안에서. 뒷자리. 농촌 봉사 활동에서 돌아오던 그 날. 우리 조가 모두 모여 있던 그곳에서. 그녀가 살짝 다가와 내게 속삭인 말.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표현 깊은 곳에서, 나는 그 말뜻이 내포한 정반대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 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느낌만은 생생히 기억한다. 그것은 투정이었지만 진실은 마음이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표정. 그녀의 눈동자. 그녀가 말할 때 오물오물하던 입술의 표정. 휙 지나가는 뒷모습에 풍겨 오던 그녀의 화장품 냄새. 아니 어쩌면, 농촌에서의 마지막 날, 검은 텐트에 랜턴 하나 덜렁 매달아 놓고 시작한 놀이. 무슨 놀이였던가? 아무튼, 내 옆에 앉은 그녀. 그리고 왠지 모르게 의식적으로 내 어깨에 자주 올라가던 그녀의 손. 웃음 속에 마주친 그녀의 밝은 미소. 그 속에 담긴 무수한 항변을 나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끌림의 몸짓>을.


나는 그 순간, 버스에서, 한없는 설렘을 느꼈다. 차창 밖을 쏜살같이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이, 그 찰나의 모습이, 마치 느린 동작처럼 길게 늘어졌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을 보는 느낌이었다. 늘어진 창밖 광경. 엿가락처럼 휜 도로 위, 저마다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복한 미소. 어질머리나는 도시의 간판들. 마음의 부림은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서늘하게 바꾸고 있었다. 더는 좋아질 수 없는, 나는 그저 사랑의 기쁨 속에 풍덩 빠져 있었다.


나는 귀대하자마자 그녀에게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거의 사흘에 한 통은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 휴가 때 꼭 만나고 싶다고 적었다.


밋밋한 푸른 체크무늬 블라우스. 흰 양말과 낮은 굽의 황갈색 구두. 장식 없는 검은 핸드백. 겨우 짜내 기억한, 그녀와의 첫 데이트. 군에서 맞은 두 번째 휴가. 함박눈이 펑펑 내린 좁은 골목길을 묵직한 소리를 내며 걸어서 들어간 카페. 작은 뜰 외에는 아무 특징이 없는 그냥 그런 그곳. 재즈 음악이 차양처럼 드리웠고, 커다란 고드름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던, 낮은 지붕들이 온전히 다 내다보이는 곳에서, 나는 얼얼한 손을 비비며 그녀와 마주 앉았다.


두려움과 행복감이 교차하였다. 말은 헛나가고 목소리는 고조되었다. 도저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시간은 흐려지고 정신은 산만하다. 침묵은 두렵고 대화는 빗나가기만 한다. 객쩍은 생각만 머릿속을 헤집는다. 별스럽게 웃음이 헤프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리고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그 날이 떠오른다. 내 기억 한편에 꾸깃꾸깃 들어앉아 당최 옅어지려고 하지를 않는다. 어떻게 인사하고 헤어졌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그녀는 내게 초청장을 불쑥 내밀었다. 어느새 그녀의 졸업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가톨릭 청년회에서 주최한 졸업 환송회가 끝나자, 참가자들은 졸업생 주위를 빙 둘러선 채,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작별의 노래. 악수와 포옹이 오가고 어떤 이들은 눈물이 맺혔다. 초대받은 이들은 입구 쪽 의자에 머쓱하게 앉아있었다. 대부분 가족이거나 연인이었다. 나도 그 들 속에 끼어 있었다. 졸업생들이 한 명씩 차례로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이윽고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천천히 환송 인파를 뒤로 한 채 홀을 빠져나왔다.


밖은 춥고 어두웠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외투 주머니에 잡은 손을 푹 찔러 넣었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절대 놓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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