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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 때쯤, 지속해서 부는 바람 소리를 등지고, 나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털썩 누워, 오늘 기록한 그리움을 다시 들추어 본다. 마음은 회한으로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어쩌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도리가 없어 보였다.
얼마 전 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확진까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지만,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삶의 무수한 자국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그냥 술술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해가 갈수록, 또렷한 듯 보이는 것들도, 어느 추리 소설처럼, 내 머릿속 뇌가 꾸미고 부풀리고 왜곡하여 만든 가상세계로 치장된 모습들도, 급속히 나를 떠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그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단 하나의 느낌으로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그녀의 눈, 코, 입, 얼굴형, 뒷모습 등을 정말이지 아무것도 또렷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느낌만이 가득하다.
어렵게 대학생이 된 그해, 유난히 따뜻했던 봄날, 나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캠퍼스를 신나게 활보하고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날들. 교정에 소풍 나온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이 짝꿍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재잘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어린이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곧이어 터진 울음. 그때 한 학생이 잽싸게 달려와 그 어린이를 안았다. 그녀는 바지와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고 환한 미소로 어린이를 달랬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내 그리움의 시작은 그날이었다.
그리고 졸업 환송회가 끝난 밤. 사람들이 사라진 텅 빈 교정. 어스름한 달빛과 가로수가 흐릿하게 길을 내어주던 곳.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걷고 또 걸었다. 무슨 말을 했던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마주한 기숙사 건물. 고불고불한 숲길의 마지막. 나는 절대로 내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잡은 손을 더욱 움켜쥐었다.
문득, 추위로 새파랗게 시린 입술로 그녀가 나에게 입 맞추었다. 키스는 빠르게 스쳤고 아쉬움은 첫 만남 때처럼 어색하고 소원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은 나를 엉거주춤하게 했다. 하지만 쓰나미처럼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밀려 왔다. 나는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솜털 보송한 스웨터의 따스한 감촉. 나는 얼음장 같은 얼굴을 비비고 입술을 찾았다. 점점이 뜨거워지는 입김. 황홀한 삶의 기쁨. 시간은 멈추었고 세상은 우리를 위해 조용히 숨죽였다.
나는 그녀의 눈길 속에 미소와 수줍음을 느꼈다. 언제나 고귀하면서도 확신에 찬 얼굴. 이 여인에게 나는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교사 발령을 기다리며 아프리카로 봉사 활동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순직하였다.
내 방 틈서리마다 온통 어둠이 깔렸다. 어둠은 서글픈 일들을 다시 생각하고 느끼게 만든다. 나는 서둘러 커튼을 열어젖힌다. 반은 기억이고 반은 망각 속에 사라진 단면의 시간이 후두두 떨어진다. 창밖 가로수는 세상의 불빛을 받아 환하다. 나는 방에 앉아 무시로 지나가는 청설모 부부를 기다린다. 그마저 없다면 허전한 노릇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리고 깊은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꿈속에 펼쳐질 흥미진진한 세상을 은근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