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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Apr 20. 2024

착한 남봉근 사장의 행복


남봉근은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한마디로 종합병원입니다. 남봉근님”     

의사를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고혈압, 고지혈증, 비만, 고혈당…. 지금 당장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나이 서른아홉. 신체 나이는 이미 예순아홉입니다.”     

봉근은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의 퇴사 소식에 회사 전체가 들썩였다. 그도 그럴 것이 봉근은 억대 연봉의 잘나가는 게임 개발자였다. 조만간 개발 이사 자리가 내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곧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봉근은 입사 후 대부분을 회사에서 살았다.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게임 프로그래머의 숙명이라고 그는 자위했다. 하루 대부분을 푹신한 의자에 박혀 손가락만 까닥였다. 줄담배에 폭음, 야식을 즐겼다. 회사에서 그의 가치는 점점 올라갔지만, 그의 사랑은 멀어져갔다. 결국 작년에 이혼 도장을 찍었다.     

텅 빈 아파트. 그는 의사의 충고대로 온라인 게임을 끊고 앞동산, 뒷동산, 강변 산책 도로를 홀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날이 저물고 집에 돌아오면 외로움이 그를 짓눌렀다. 뭔가를 해야만 했다. 몸을 움직이는 직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차례로 한식, 일식, 중식조리기능사를 취득했다.      

남봉근은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있는 한인 식당에 주방보조로 취업했다. 브로츠와프는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한 공업도시다. 모 대기업의 전기 자동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는 근로자의 삼시 세끼 식사를 준비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오전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12시간, 주 6일 근무의 힘든 노동 환경과 적은 급여지만 그는 만족했다.     

우선 몸을 움직여 일한다는 게 좋았다. 그리고 좋은 성품의 한국인 쉐프가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직원들도 친절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자 그는 몰라보게 건강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쭉 이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끝이 보였다. 공장 건설이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 식당을 이용하던 150명에 달하던 건설 인력이 어느새 절반으로 줄었다. 그에 맞추어 식당 직원들도 절반이나 감소했다. 남봉근은 조만간 자신도 잘리게 될 것을 직감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향후 대책이 필요했다. 그때, 30년 경력의 쉐프가 그에게 제안했다.     

“봉근 씨,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단 하나의 음식이 뭔 줄 알아요?”     

“단 하나의 음식요?”     

“네, 그건 튀김입니다. 튀김 싫어하는 민족은 없어요. 그러니 여기서 장사를 하려면 튀김집을 하세요.”     

그는 쉐프의 조언대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날아갔다. 그곳 중앙역 근처 담락 거리에 있는 감자튀김 맛집 마네켄피스(MannekenPis)를 직접 구경했다. 과연 소문대로 관광객들이 작은 매장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품목은 단 하나, 감자튀김 포장 판매. 하지만 소스는 수십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 유럽인들은 자신만의 소스를 늘 고집합니다.”     

브로츠와프로 돌아온 그는 쉐프와 함께 소스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인기 있는 각종 튀김을 연구했다.      

몇 달 뒤 그는, 저축한 돈을 몽땅 털어, 브로츠와프 시내 중심가에 포장 판매 튀김 전문점을 개점했다. 예쁘고 날씬한 우크라이나 여직원을 두 명 고용하여 댄스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다양한 한국식 튀김을 즉석에서 데워 소스와 함께 제공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불티나게 튀김이 팔렸다.     

소문은 삽시간에 유럽 한인 사회에 번졌다. 투자자들이 몰려들고 프랜차이즈 제안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하여 직영점만 고집했다. 음식의 품질과 서비스를 깐깐하게 체크하고 직원들의 복지와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일 년 사이 직영점은 스무 개로 늘어났다. 그는 매일 매장한 곳씩 방문하여 모든 것을 꼼꼼하게 챙겼다. 특히 직원들의 복지에 귀를 기울였다.      

고국을 떠나 폴란드에서 일하는 우크라이나 여인들의 상당수는 소녀 가장이었다. 고향에 부양할 자식 혹은 형제, 부모들이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70년대 상황과 비슷했다. 착한 남봉근 사장은 그들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므로 직원들 사이에 돌싱 사장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이때쯤 그의 즐거움 중 하나는 직원들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거였다. 남봉근은, 그날 방문한 매장이 클로즈하면, 근처 좋은 식당으로 그들을 초빙하여 제법 값비싼 음식을 제공했다. 왜냐하면 직원들 대부분이 싸구려 패스트 푸드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남봉근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았고 모두를 가감없이 사랑한 시기였다.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덩달아 인기를 끈 게 있으니 바로 한국 남자였다. 안 그래도 K-팝과 K-드라마로 한국에 대한 호감이 치솟던 시기에 좋은 한국인 사장 밑에서 근무하다 보니 우크라이나 직원들에게 한국 남자는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선한 남봉근이 이를 보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우선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파악하고자 주요 도시를 여행했다. 키이우, 도네츠크, 드니프로, 하르키우, 리비우, 오데사, 자포리자를 차례로 방문하여 유심히 그들의 삶을 살폈다. 그가 방문한 시기는 아직 전쟁 전이었으므로 도시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거리의 모습은 우리나라 70년대와 흡사했다. 낡은 차와 버스, 전철이 돌아다녔고 건물은 허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팍팍한 그들의 삶이 피부에 와닿았다. 그리고 식당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식탁에는 어김없이 보드카와 콜라, 고기가 놓여 있었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처럼 보드카의 나라였다. 독한 술은 기대 수명을 대폭 낮추었다. 특히 남자는 60대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여성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가난한 여초 나라. 그러니 여자가 집안을 책임지는 경우가 높았다. 그녀들의 삶이 더욱 고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남봉근은 결심을 굳히고 곧바로 한국으로 향했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국제결혼 정보 업체와 계약을 맺고 한국의 예비 신랑 중, 나이는 많지만 성실하고 착한 사람 위주로 선발해 폴란드로 초청했다. 그리고 그는 우선, 회사 직원 중 국제 결혼 신청자를 받았다. 대부분 여직원이 손을 들었다.      

결과는 매우 만족이었다. 90%가 넘는 성사율을 나타냈다. 이에 고무된 남봉근은 폴란드에 국제결혼 정보 회사를 정식으로 발족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특히 폴란드 인근 동유럽 국가 출신 여성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신중하게 여성들을 선별했다. 미모보다 인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남자와 여자는 대립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므로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사회는포용과 용서너그러움과 따스함을 보편타당한 가치로 지녀야 한다는 점을 그는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남봉근 사장의 국제결혼 회사 소식은 한국에도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가뜩이나 수조 원을 쏟아붓고도 출산율 0.7 로 고민하던 정부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남봉근 사장의 인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나날이 치솟았다.      

하지만 빛이 밝으면 그림자 또한 짙어지는 법. 한국 남자의 국제결혼에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내던 일부 극단 페미니스트 커뮤니티가 몇몇 편향적인 언론과 손잡고 남봉근 사장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처음은 한 우크라이나 신부가 결혼 한 달 만에 잠적한 사건이 발생하고부터였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커뮤니티에 <영악한 우크라이나 여자와 멍청한 한국 남자>를 싸잡아 비난하는 글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 불씨는 남봉근 사장의 인스타그램으로 번졌다. 그의 사진들. 매일 저녁 고급 레스토랑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직원과 찍은 그 사진들. 그는 어느새 비싼 밥 사주고 불쌍한 우크라이나 여직원을 꼬드겨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는 “난봉꾼”으로 변했다.     

착한 남봉근 사장은 어쩔 수 없이 인스타그램을 삭제했다. 그리고 그는 살기 위해 다시 한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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