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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발버터 Aug 09. 2023

충분히 의미있겠죠.

(6) 자기위로

시험을 마친 후 눈은 생기를 잃은 채로 아침만 되면 도서관을 향했다. 가방엔 모의고사 책들이 가득했지만, 그것들은 집을 나설 때 엄마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한 장식품이었을 뿐 도서관에서 그 책들은 빛조차 볼 수 없었다. 그곳에서 문제 풀이 대신 책만 읽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싫은 내게 책은 그나마 유일한 도피처였다.


책에는 수십억의 빚을 떠안다가 사업에 성공한 이야기, 늦은 나이에 공부해서 당당히 합격한 이야기 등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던 사람들이 성공하는 스토리가 많다. 그 사람들의 과정을 보면 지금 내 고난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책도 억눌려있는 감정들을 해결하는데 잠깐의 진통제 역할은 해줄지 몰라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진 않았다. 공허했다. 

시간이 지나자 우울했던 마음은 점점 물 밑으로 가라앉았고, 그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허송세월하는 게 인생인가 싶었다.

책을 읽다가 눈꺼풀이 내려올 때는 취업사이트에 들어가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면 여기서 우연히 운명의 직장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또한, 세 번의 시험 준비를 하며 모았던 돈을 거의 다 써버린 탓에 이제는 직장을 잡아야 했다. 아버지도 퇴직하신 마당에 집안의 장남으로서 언제까지 백수처럼 있을 수는 없었다. 일하면서 모은 돈을 취업 준비를 하면서 다 써버리고, 다시 일을 하면서 취업 준비할 돈을 또 모아야 한다니. 옛말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있다. 선조들의 지혜에 박수가 나온다. 조상님의 후손이 지금 딱 그러고 있습니다요.

그렇게 하염없이 스크롤만 내리던 날, 임기제 공무원을 뽑는 공고를 보았다.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다른 공고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무런 의욕도 없던 얼굴엔 생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만약, 임기제마저도 떨어진다면 공무원은 내 길이 아님을 인정하고 깨끗이 포기하리라 다짐했다.


첫 서류전형의 난관은 다행히 합격이었다. 지원요건이 6개월 이상의 경력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퇴사한 직장에서 6개월은 버틴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공무원과는 전혀 관련 없다고 생각한 경력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된다니. 역시 모든 건 다 이어지는 거라고 잠시나마 자위할 수 있었다. 면접 날까지 매일 거울을 보며 어색하게나마 웃는 모습과 1분 자기소개 멘트를 연습했다. 사실 그동안 면접다운 면접을 제대로 치러본 적이 없어서 너무나 떨렸다. 이십 대에 경험한 면접이라곤 아르바이트할 때 약식 면접이 전부였다.


면접 날, 고개를 푹 숙인 채 추리닝 차림의 후줄근한 백수의 모습이 아닌 정장을 빼입고 당당한 걸음으로 시청으로 향했다. 면접을 보러 간 시청은 정말 웅장하게 느껴졌다. 이 건물에서 나도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면접 대기를 하면서 안내해주는 공무원을 보면서 속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나도 이 년 동안 당신처럼 되려고 그렇게나 아득바득 살았는데…… 당신은 그 자리에 있으려고 얼마나 더 치열하게 살았을까.’     


대기실에서 미리 준비한 예상 질문들과 답변을 계속 되뇌었다. 긴장한 탓인지 배는 점점 아파졌다. 순서가 다가옴에 따라 머릿속에선 벼락치기로 암기한 지자체의 인구수와 시장님의 공약들만 뛰어놀았다.

면접장 문이 드디어 열리고 깊은 심호흡을 내쉰 후 들어간 곳에는 5명의 심사위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간단히 1분 자기소개를 해달라는 말에 며칠간 달달 외웠던 대사를 주-욱 내뱉었다. 자기소개를 마친 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심사위원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다. 아직은 내 예상 범위다. 그러나 다음 질문들은 그동안 준비한 질문들과 아주 달랐다. 나는 현 지자체의 인구수, 지역 특색, 시장님의 공약 등 현 지자체가 가지고 있는 부분들에 초점을 맞추어서 준비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지자체 관련 질문이 아닌 나라는 사람에 대한 질문들만 하셨다.


“지원자의 어떤 부분이 공무원의 특성과 잘 맞는다고 생각하나요?”


점점 입가에 미소는 사라지고 주먹을 꽉 쥔 손에선 식은땀이 나온다.


‘단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이 공무원과 맞을 거 같아요.’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봐도 탈락이다. 너무 꾸미지도 그렇다고 너무 솔직하지도 않은 그 사이의 말이 필요하다. 결국 면접은 같은 뜻을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의 싸움이다.

다행히 아직 꺼내지 않은 패가 남아있었다. 두 번째 시험이 끝나고 인생을 돌아보며 한 달간 적은 100쪽 분량의 글. 이 속에는 90%만 솔직한 감정들이 담겨있다.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맞춰 내가 적은 글들을 떠올리며 답을 했다. 다행히 크게 버벅거리지 않고 잘 답변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도 고개를 끄덕이시는 걸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때 쓴 글이 또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된다니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가벼운 농담을 던지시는 면접관을 끝으로 공무원과 관련된 모든 일이 끝이 났다. 이제 운명은 내가 아닌 신이 쥐고 있다.


임기제 공무원 발표 날. 면접의 분위기를 떠올렸을 땐 분명 좋은 느낌이다. 그러나 잘 봤다고 생각하고 뒤통수를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방심할 수 없었다. 특히, 지난 과거에도 현장의 느낌과 실제 결과가 정반대였던 경우의 수만 마주했던 나였기에 더욱더 긴장했다. 부모님은 오히려 기대하다가 더 실망할까 봐 애초에 기대도 안 하셨다. 이번에도 떨어진다면 공무원의 길은 깔끔히 포기하려 했다.      


오전 10시. 드디어 올라온 합격 수험번호와 내 수험번호를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요즘에는 인터넷에 로그인만 하면 바로 결과가 뜨는데 여긴 아직도 수험번호를 직접 비교해야 하는 아날로그적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더 떨린다. 내 번호가… 내 번호가… 찾았다!

아직 포기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일까. 그렇게나 이 년 동안 원하던 직장을 임기제지만 공무원의 신분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공무원증 뒤에는 여전히 임기제라는 꼬리표가 달려있다. 이걸 볼 때마다 여전히 불안정한 인생이 진행형임을 깨닫는다. 그런데도 꺾이지 않고 나아가고 있어 한편으론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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