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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커 Nov 06. 2023

2. 아이스 바닐라라테 (2)

    집에 돌아온 상봉은 화장실로 들어가 발을 깨끗이 닦는다. 수건으로 꼼꼼히 물기를 제거하고 굳게 닫혔던 민서의 방에 들어간다. 방 안에는 아직까지 민서의 냄새가 언뜻 남아있는 듯하다. 냄새가 사라지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닫고 민서의 침대에 눕는다.

    "민서야"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딸이 옆에 있는 것만 같다.

    "우리 딸...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은데... 딸은 아빠 보고 있어? 아빠한테도 얼굴 좀 보여줄 수 없을까?"

    상봉은 눈을 더욱 질끈 감는다. 민서는 눈을 감아야 나타난다.

    "혹시 내가 미워서 도망간 거니? 우리 아들 딸 행복하게 해 주기로 했는데... 아빠가 미안해... 미안해..."

    한참을 독백하던 상봉은 따뜻한 이불의 온기에 기대어 잠에 들었다.


    "흐억..!"

    한 밤에 눈을 뜬 상봉은 급히 거실로 뛰쳐나갔다. 새벽 두 시였다. 상봉은 급히 민기의 방 문을 열었다. 다행히 민기는 곤히 잠들어있었다. 상봉은 새벽 내내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다섯 시가 되어 들려오는 알람소리에 충무김밥을 만든 후 회사로 나섰다. 웬일로 주차장이 한산하다. 평소대로라면 지하 3층까지는 내려가야 하는데 1층부터 빈자리가 가득이다. 혹시 주말인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한다.

    '금요일인데...'

    상봉은 로비를 지키던 경비아저씨로부터 오늘이 회사창립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괜한 헛걸음을 했군. 이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히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집에 들어서니 살짝 습하면서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다. 민기가 방금 전에 나간 듯했다. 식탁에 텅 비어있는 그릇이 보인다. 아침밥을 잘 챙겨 먹고 갔구나. 조금 부족했으려나. 상봉은 내일부터 밥 양을 조금 더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민기가 잠시 앉아있었을 식탁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상봉은 곧 마음을 결정했다.

    '오늘 저녁을 같이 먹어야겠어.'

    오랜만에 단 둘이 저녁을 먹으면서 민기와의 오해를 풀 것이다. 어제 못 산 햄과 당근을 사서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야겠다. 금요일마다 동네에 찾아오는 포장마차에서 타코야키도 살 것이다. 가끔 퇴근길에 사가면 민기가 그렇게 좋아라 했었다. 상봉은 당장이라도 요리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저녁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이불빨래나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렇게 두시가 되었을 때쯤 상봉은 민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자. 수업 끝나고 곧장 집으로 오렴.'

    상봉은 마트에서 재료를 사고는 이전에 자주 찾아가던 포장마차로 향했다. 그런데 포장마차가 자리했어야 했던 곳이 텅 비어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상봉은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하였다. 한동안을 그러고 있자 상가의 반찬가게 아주머니가 나와서 상봉에게 말을 건다.

    "민서, 아니 민기아빠, 여기서 뭐해요?"

    "여기 금요일마다 열리는 포장마차 어디 갔나요?"

    "에이, 그거 안 온 지가 언젠데. 여기 단속 걸렸잖아요. 그래서 저 뒷골목으로 갔을 거예요. 그리로 옮기고 가격이 비싸져서 난 이제 안 가. 근데 글쎄 사람들이 더 찾는다니까? 우리 집 반찬은 가격도 안 올렸는데 장사는 왜 더 안 되는 거야 정말."

    뒷골목이라면 여기서 20분은 걸어야 한다. 상봉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빠른 속도로 걷던 상봉이 갑자기 멈춰 선 건 얼핏 코를 스치고 간 냄새 때문이었다. 상봉은 고개를 숙이고 실눈을 뜬 채로 냄새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그 향이 꽤 진해졌을 때 고개를 든 상봉 앞에는 낯선 카페가 있었다.

    '커피 오마카세'

    처음 본 카페에서 사무치는 냄새가 난다. 바로 알 수 있는, 그래, 민서의 냄새. 상봉은 민서의 방문을 열듯 조심히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을 꽉 채우는 하나의 큰 테이블, 중심을 기준으로 좌우로 복합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른쪽 큰 창이 있는 자리는 산란하는 햇빛으로 가득했고, 왼쪽 자리에는 햇살이 닿아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책이 공간을 채워 새벽같이 촉촉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상봉은 오른쪽 자리의 빈 틈을 비집고 카운터 앞으로 다가섰다. 사장은 미묘한 눈을 하고는 뒤를 돈다. 상봉은 사장의 뒤통수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곧 도르륵, 도르륵, 얼음을 굴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장이 상봉에게 커피를 건넨다.

    "아이스 바닐라라테입니다. 4천 원이에요."

    상봉은 타코야키를 사려고 챙겨 온 현금 만원을 건넨다. 사장은 5천 원과 1천 원 한 장씩을 꺼내 거슬러준다. 지폐와 커피를 양손에 든 상봉은 수많은 책이 놓인 왼쪽 자리에 앉는다. 얼음이 듬뿍 담긴 커피를 빤히 바라본다. 빨대를 입에 댄 후로도 한동안 멈춰 있던 상봉은 쪼록-하고 고작 몇 방울을 삼킨다. 혓바닥 위에 안착한 커피 방울이 코와 식도를 넘나들며 상봉의 몸을 휘감는다. 매일 밤 민서의 방에서 나던 냄새였다. 하루하루 옅어지던, 다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나던, 그 냄새. 그런데 커피 안에는 마치 방금 전에 다녀간 것처럼, 어쩌면 지금도 상봉 옆에 있는 것처럼, 민서가 가득했다.

    아끼지 않아도, 마음껏 삼켜도 된다. 상봉은 빨대를 덜어내고 바닐라라테를 들이켰다. 아주 오랫동안 목이 말랐었다. 세 입 만에 커피 한 잔을 비운 상봉은 다시 사장에게 향했다. 사장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뒤를 돌아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장의 뒤통수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상봉은 다시 뒤를 돈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사장의 손에는 따뜻한 바닐라라테가 들려있었다.

    "따뜻한 바닐라라테입니다."

    상봉은 저항 없이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냉큼 한 잔을 다 마셔버리고 싶었지만 커피가 너무 뜨거웠기에 손으로 컵을 꼭 잡고 차가운 입김을 불어댔다. 커피를 식히던 상봉의 건너편 자리에 사장이 앉는다. 사장이 말을 건넨다.

    "바닐라라테를 드리던 손님이 있었어요. 누가 뭐래도 바닐라라테가 어울리는 분이었거든요.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드리면 꿀떡꿀떡 마시고는 또 와서 초롱한 눈으로 절 바라봐요. 마치 한 잔만 더 달라는 듯이요."

    상봉은 커피에서 나는 연기를 바라봤다. 아직도 김이 폴폴 나는 걸 보니 한참은 더 식혀야 할 듯했다. 사장은 이어 말했다.

    "그런데 한 번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면 심장이 콩콩 뛰거든요. 그래서 두 번째 커피는 천천히 마시라고 따뜻한 바닐라라테로 드리곤 했어요. 그럼 그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나서는 빈 머그컵에 코를 한참을 데고 킁킁거리다가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아무래도 두 잔조차 아쉬웠던 건지, 아니면 남아있는 따뜻한 온기가 취향에 맞으셨던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민서의 이야기였다. 사장은 민서를 아는 듯했다. 상봉이 사장을 빤히 쳐다봤지만 사장은 상봉의 커피잔만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손님이 한참을 안 오셔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는 그 손님의 집도, 번호도 모르니까 기다릴 수밖에요."

    상봉이 물었다.

    "혹시 우리 딸을 아시나요?"

    "아버지를 똑 닮았어요. 눈도, 코도, 입도, 표정까지도요."

    "민서는 이제 여기 못 옵니다."

    "... 유감의 말씀드려요."

    상봉은 사장의 태도가 의아했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 글쎄, 좁은 동네라 소문이 이곳까지 퍼진 걸까. 상봉은 사장이 민서의 일에 대해 어떻게 안 것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딸의 죽음에 대해 떠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주위를 둘러봤다. 이 순간 상봉이 보는 카페의 풍경은 민서가 살아생전 종종 보던 풍경이었을 것이다. 상봉이 말했다.

    "우리 딸이 이곳을 자주 찾았나요?"

    "화요일마다 오셔서 여기 있는 책을 읽고 가시곤 했어요. 이 자리를 좋아하셨지요."

    사장은 상봉의 자리를 가리켰다. 민서가 이곳을 참 좋아했을 것 같았다. 상봉이 물었다.

    "이곳을 좋아했나요?"

    사장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편하다고 하셨어요."

    우리 딸이 이 자리에서 책을 읽으며 편안히 쉬었구나. 상봉은 아빠가 되어서 딸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지도 못했다는 생각에 절망감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우는 표정을 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 쉬러 온 민서의 영혼이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봉은 아무 이야기나 꺼내어 분위기를 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랑 먹을 타코야키를 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이 어릴 적에 자주 가던 포장마차가 이 근처로 옮겼다고 해서요."

    "어디인지 알겠어요. 여기서 오른쪽 골목으로 두 번만 꺾으면 있어요. 아드님 먹을 간식도 사주시고, 다정하신 아버지이시네요."

    "아니요. 그럴리가요. 제 아들은 저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정말 제가 죽였을지도 모르겠어요."

    상봉은 한참을 바라보던 바닐라라테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책장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말을 이었다.

    "자신도 누나와 엄마처럼 버려질 거라고 생각해요. 혼자 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민기가 없다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상봉은 처음 본 사장 앞에서 자신의 속 이야기를 여과 없이 뱉어내는 자신의 입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한번 터진 입은 주체할 수 없었다. 사장은 다시 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손님. 저희 카페 단골 중에 대학생이 있는데요, 댁의 아드님이 그 학생한테 과외를 받아보는 건 어떠세요?"

    "네? 갑자기 왜 그러시죠?"

    상봉은 난데없이 과외 이야기를 하는 사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님께서는 사랑스러운 따님을 잃으셨지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제가 감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드님은 든든한 누나를 잃었습니다. 아드님은 아직 어리고 서투르기 때문에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모를 거예요. 사실 저희 같은 어른들도 이별을 대처하는 법은 잘 모르지요. 확실한 건, 아드님은 지금 피나는 노력으로 살기 위해 투쟁 중이라는 거예요. 살아내기 위해서요.

    그러니 실컷 투쟁하도록 해주세요. 자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미워하기도 하고, 누나를 그리워하기도 하게 해 주세요. 그동안 저희 어른들은 아이가 싸우다 다치지 않을 수 있도록 보호대를 건네줍시다. 제 생각에 저희 단골 학생은 민서씨를 대신해서 아드님에게 듬직한 보호대가 되어줄 수 있을 거예요. 공부도 되게 잘해요. 무려 서울대학교 출신이랍니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사장은 괜히 빙긋 웃어 보였다. 사장이 말을 이었다.

    "보호대를 차고 힘껏 싸우는 아이의 뒤에서, 우리가 서 있읍시다. 아이가 싸우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고, 너를 믿고 응원하고 있었다고 말해주자고요."

    상봉은 여태껏 아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자식 잃은 부모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며 자기 연민에 빠져있느라 아들의 부서져가는 마음은 하나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딸에게도, 아들에게도, 도저히 아빠의 자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동시에 상봉은 사장의 차분한 목소리와 결연한 눈빛에 그의 주장이 꽤 믿을만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기가 자신의 말을 들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들이 제 말을 들을까요? 저와 대화하는 것조차 꺼리는데..."

    "그렇다면 거기서부터가 첫걸음이겠네요. 자고로 거래에는 마땅한 패를 가지고 있어야지요. 아드님이 원하는 것 한 가지를 해줘야 손님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선 후리씨는 제가 좀 아는데,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과외비만 잘 챙겨주면 분명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요. 그러니 손님께서는 아드님과 거래를 성사시키신 후에 이곳을 찾아와 주세요."

    민기의 과외를 해 줄 학생의 이름이 후리인 듯했다. 서울대 학생이라는 타이틀과는 대비되는 허술한 이름에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좋아지는 이름이었다. 상봉은 잠시 웃음 짓고는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커피 정말 맛있었습니다. 자주 들르겠습니다."

    "언제든지요. 이곳은 문이 닫혀있는 것 같아도 늘 활짝 열려있거든요. 아참, 타코야키 꼭 사서 가세요."


    상봉은 민기와의 거래 생각에 새까맣게 까먹어버렸던 타코야키 스무 개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상봉은 완벽한 오므라이스를 위해 이미 수백 번은 본 요리 영상을 다시 보면서 레시피를 곱씹었다. 야채는 너무 많이 넣지 말고, 손톱 반의 반만큼 작게 썰고, 당근부터 시작하여 햄, 양파 순으로 볶는다. 미리 식혀둔 흰 밥을 넣고 케첩 다섯 스푼. 미원 한 꼬집... 한 꼬집만 더 넣자. 주걱으로 볶음밥을 비비고 밥그릇에 꾹꾹 옮겨 담는다. 그리고는 넓은 그릇에 조심히 덮어 올린다. 툭툭 쳐준 후 밥그릇을 들어 보이면 동그란 볶음밥 완성. 프라이팬 하나를 더 꺼내서 식용유를 듬뿍 두르고 풀어둔 계란이 촥 펼쳐지게 붓는다. 금세 익어가는 계란지단은 한 번에 뒤집어야 한다. 젓가락 두 개와 손목 스냅을 이용해 지단을 뒤집는다. 성공. 반대편은 10초 정도만 익히고 밥 위에 살포시 올린다. 두 번째로 만든 지단은 식용유가 부족해서인지 프라이팬 바닥에 눌어붙어버렸다. 이 못난이 오므라이스는 상봉의 것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맨 위에 웃음 이모티콘 모양으로 케첩을 뿌리면 완성이다. 식탁에 오므라이스 두 개와 수저 두 쌍을 두고 시계를 본다. 이미 민기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면 돌아왔을 시간보다 30분이 지나있었다. 어쩌면 민기는 저녁을 먹으러 집에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상봉은 씁쓸해졌다.

    띡-띡-띡-띡-띡-띡

    양반은 못 되는 민기였다. 상봉은 도어록 소리가 세 번쯤 울릴 때까지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일까 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민기는 방으로 쌩 들어가 쿵쿵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상봉을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가 쿵쿵거리면서 손을 씻었다. 잠시 고요해지더니 민기가 슬쩍 식탁에 와서 앉았다.

    "저녁 안 먹었지? 너 좋아하는 오므라이스 했어."

    "잘 먹겠습니다."

    머쓱한 공기 속에서 민기는 일주일은 굶은 사람처럼 코를 박고 오므라이스를 먹었다. 반면 상봉은 밥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민기가 밥을 금세 해치우자 상봉은 자신의 오므라이스 절반을 덜어 민기의 그릇에 옮겨 담았다. 민기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상봉이 말했다.

    "냉장고에 타코야키도 사놨어. 우리 전에 많이 사 먹었던 곳 있지? 거기 옆 동네로 옮겨서 찾느라 고생했지 뭐야."

    고개를 숙인 민기의 정수리가 본론을 꺼내라고 말하는 듯했다. 상봉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민기야. 혹시 말이야... 그, 과외 한 번 해볼래?"

    민기는 입 안에 밥을 한가득 넣고 고개만 도리도리 했다. 싫다는 뜻이었다.

    "저기, 아빠가 아는 사람이 네 과외를 해준다네. 친한 형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해 보는 게 어떨까?"

    민기는 밥을 씹으며 한 번 더 도리도리 했다. 카페 사장의 말마따나 거래를 해야 한다.

    "그렇구나. 그럼 혹시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아빠에게 말해줄래? 아빠랑 소원을 거래하는 거야. 나는 네가 과외하는 게 소원이야. 네 소원은 뭐니?"

    민기는 가만히 있었다. 표정을 보니 소원이 없는 것 같지는 않고, 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괜찮아 말해봐. 아빠가 다 들어줄게."

    민기는 씹던 밥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자퇴하게 해 주세요."

    상봉은 선뜻 대답을 하기 힘들었다. 졸업까지 1년도 남지 않은 이 마당에 자퇴라니.

    "민기야 자퇴는 말이야..."

    "뭐든 들어준다면서요. 자퇴가 아니면 거래하지 않을 거예요."

    민기는 거래에 능했다. 여기서 상봉이 거래를 깬다면 과외를 시키지도 못하고, 민기와의 관계도 더 나빠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거래를 성사시키고 자퇴 문제는 이후에 설득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 좋아. 그럼 과외를 세 달 동안 그만두지 않는다면 자퇴를 시켜줄게."

    "한 달이요."

    민기는 거래에 매우 능했다. 상봉은 어느새 쩔쩔매고 있었다.

    "한 달은 정말 안돼. 일주일에 과외 세 번 하면 고작 열두 번이야. 두 달 어떻니."

    "그래요. 두 달로 해요."

    후, 어려웠지만 거래는 성사되었다. 거래가 불발될까 마음을 졸였던 상봉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오므라이스를 먹기 시작했다. 민기는 이미 그릇을 싹 비운 후였지만 상봉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뒤적거렸다. 새벽에 일어난 상봉은 식탁 위에 한때 타코야키가 들어있던 빈 종이 박스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오므라이스에 그린 웃음 이모티콘과 같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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