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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즈 Nov 23. 2023

어차피 무기력은 또 오겠지만

요일별 무드 정해 활력 찾기


11월 말



제법 쌀쌀해진 아침이다.

구겨진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 베란다 창을 열면 밤새 차가워진 공기로 물기가 촉촉하다. 내다보이는 아파트 단지 1층에는 해가 다 뜨지도 않은 어스름한 새벽 공기 사이로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이 있다.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몸 전체를 감싸는 말끔한 오버핏의 카키색 롱코트에 검정 앵클부츠은 여자가 다급하게 차 문을 열면서 코트 밑 부분을 감싸며 엉덩이를 쑥 넣는다. 급하게 팩트만 얹고 입술 색은 바르지 못한 얼굴에서 또래쯤 되는 나이가 연상됐다. 연한 갈색빛이 도는 머리에는 주기적으로 미용실에서 관리된 듯한 윤기가 은은했고, 묵직한 내용물이 든 가방끈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왠지 모르게 처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정체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내 커리어가 떠올랐때문일 것이다. 직장인이 부러운 딱 한 순간이 있다. 바로 아침이다.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 움직이는 오전의 활력 말이다.






기다렸어요~
깊고~ 깊은~ 꿈에서~

 

같은 시간, 김엄마는 집 밖을 나설 이유가 없다. 지인과 약속도 없는 오늘은 집콕이 예상된다. 혼자서 알뜰하게 시간 보내려던 김엄마의 의지는 그리 대단하지 않아 작은 유혹에도 붙잡히는 일이 허다하다. 김엄마를 소파에 주저앉힌 건, '이역관'이다. 가을에 담근 머루주를 길채와 겨울에 꺼내 마시려는 장현 나리를 또 보고 있다.




이 드라마는 참 희한하다.

역사와 멜로를 버무렸는데, 인물을 엮고 갈등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예상을 뒤엎는 서사에 내내 압도된다.


량음은 또 어떤가. 량음의 대사 하나하나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사랑의 순정이 너무 깊어 먹먹하고 아련하다. 소현 세자는 잘생긴 데다 딕션까지 완벽한데, 저런 왕자가 숨구멍에 피를 뿜어내고 죽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으리오. 


작가가 미쳤다.

지난주 방영된 마지막 방송에서는, 첫회의 장면을 엔딩에서 아주 합리적이고 아름답게 회수했다. 이런 이야기 구축 방식에서 작가의 천재성이 엿보인다. 문제는 이런 것을 캐치해 내는 김엄마 스스로가 작가스러워서 혼자서 우쭐하는 지점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잘난 줄 안다더니 자화자찬을 누가 말리랴.

량음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세상에서 분꽃 피는 소리도 듣고 싶은 게 소원인 장현은, 자기가 대상 받는 소리도 들리는지 모르겠다.




다 좋다. 재밌는데 티브이를 끄고 나면 현실에서 맥이 풀어진다는 것이 문제. 집콕 김엄마무기력 증후군이다.  




뭘 할까.

나른함을 밀어내고 몰입할 만한 일을 찾던 김엄마의 선택지에 잡힌 것은 스마트폰이다.

검색창에 미라클 모닝, 교육대기자의 2024 대입 입시 변화, 리더스북에서 챕터북 넘어가는 법, 학습만화만 보는 아이, 초5 중등 심화. 꼬리를 물고 따라붙는 알고리즘이지만 영 흥미롭지 않다. 핸드폰 화면을 꺼도 때때로 울리는 영재 선발 공고문은 이대로면 부족할 것 같은 불안을 부추겨, 마음 한 켠에 헛헛함이 다시 고개를 든다.





이것이 김엄마가 찾는 무기력의 대안일까.

진짜 활력은 타인보다 자신을 한 기쁨일 때 차올랐던 경험이 잦다. 그러니까 관심의 방향을 타자가 아닌 내게로 돌려야 한다.


집콕 김엄마를 위한 일을 기획하기로 한다.




요일별 컨셉을 잡는 것이다.

이름하여 다이나믹한 요일별 무드를 정해 활력 찾기. 집콕하는 김엄마의 특성상 무채색의 월요일이 계속 반복될 여지가 크므로 요일별 테마를 정해두면 생기가 돌 수 있다.

월요일은 집청소, 화요일은 지인 만나기 또는 등산, 수요일은 돌발 상황을 위해 비워둔다. 

목요일쯤에는 도서관이나 커피숍을 가고, 금요일은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주말을 준비하기로 한다.


포인트는 목요일이다.

특히 수요일에서 목요일을 넘어갈 때가 중요하다. 그 시점까지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인생을 헛산다는 느낌이 오므로 조심해야 한다. 남은 주말까지 무력한 기운에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미션이 있다.

집과 아이와 남편을 마음속에서 격리하고, 내 인생 50세를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는 것이다. 지금부터 십 년 동안 무엇을 꾸준히 깊이 있게 해 나갈 것인가. 김엄마의 목요일을 따라가 보자.







목요일 오전 9시 10분. 

송한 니트와 롱치마를 매치해 산뜻한 캐주얼 차림을 한 김엄마의 에코백에는 A3사이즈의 수첩과 사색볼펜이 있다.

수불석권. 김종원 작가의 <글쓰기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 책 한 권도 잊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소탈하다'라는 단어가 생각나, 머릿속으로 오늘 쓸 문장을 만들어보면 금방 시간이 지나간다.



걸어간 곳은 도서관.

십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찾아 넘겨보는데, 소장해서 봐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어 예스 24에 바로 구매한다. 이 순간은 꽤 브런치 작가스런 모먼트라 누가 관찰카메라로 좀 봤으면 하고 내심 자랑스럽다. 소소한 찰나의 순간에 자존감이 채워져 반복하는 행위다.



어디에 앉을까.

도서관 자료실에서 창가 바로 곁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노트와 펜을 꺼내 오늘 날짜부터 적으면서 생각할 거리에 집중한다. 김엄마의 디깅은 글쓰기니까. 똑같은 일상을 살면서 다른 내일을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했다. 평소에 썼던 글을 좀 더 위에서 내려다봤다. 세세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디테일에만 신경을 썼는데, 구조적인 부분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지점을 파악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에세이 한 편을 써낼지 궁리한다. 지치지 않는 줌인 줌아웃을 통해 내 글을 요리조리 뜯어보면서 더 잘 쓰고 싶다는 욕망에 불을 끼얹는 김엄마다.



속이 꽉 차오른다.

이런 숙고의 과정을 한 시간쯤 들인 날의 뿌듯함은 돈 주고 살 수도 없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성과는 없더라도 속에서 찰랑거리는 묵직한 에너지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12시 반쯤 약간의 허기진 상태를 느낄 때 일어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커피숍에 들러 라테 한 잔을 주문하고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불현듯 떠올린 오늘 글의 제목에 대한 아이디어를 재빠르게 핸드폰에 메모했다.  






매번 이럴 순 없다.

도서관에 가도 영 처지는 날에는 빨리 나와 다이소를 가면 특효다. 딱 마음에 드는 표지 색깔과 사이즈의 노트를 구매하는 데에  천 원만 쓰면, 세 시간의 기분이 보장된다. 그 노트에 이때껏 디깅 한 목록을 쭉 써 내려간다. 왜냐하면 거기에 김엄마의 찐 노후 대책이 들어있으므로. 




이 정도면 해결됐다.

고금리 시기에 집콕 주부로서 할 수 있는 무난한 사치다. 호랑이 보다 무서운 무력함을 떨쳐내는 데 성공한 것도 어딘가. 야무지게 혼자 보내는 시간 속에서 어느 정도 오늘치 활력이 차오르는 김엄마다. 이제 아침의 그녀가 사무치게 부럽지 않다. 어찌 보면 이 여유를 느끼는 순간이 있는 만큼 내가 더 만족스러운 일상이라 여겨본다.









어차피 무기력은 또 올 것이다.

무시로 무력함이 찾아오는 김엄마에게 출근하는 그녀 같은 존재는 잊을만하면 등장해 마음을 어지럽힌다. 가 갖지 못한 것이 그뿐이랴.  무엇과 내 것을 견주는 일은 김엄마의 인생에서 계속되는 이벤트다. 알고 보면 아침에 오버핏을 입고 출근하는 그녀도, 직장에서 치고 올라오는 유능한 후배들을 보며, 자신의 커리어를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을  터. 종종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오는 만족스러운 평가에도 '그래서 네가 그중에서 어느 정도인 건데'를 뾰족하 떠올리는 모습에 스로 몸서리칠 때가 있는 김엄마다. 어쩌겠는가. 적자생존의 DNA가 이렇게 경쟁에서 이기고 싶도록 만들어둔 걸. 이제 김엄마는 질투 나는 대상을 보면 신호등을 켠다. 멈춰 생각하라는 신호다.  민낯을 파헤치면 김엄마가 그토록 욕망하는 씨앗을 고스란히 득템 할 수 데 잘 모아두면 쓸 데가 많다.




활력을 찾으려는가. 무기력한 엄마 말고 생기 있는 눈빛을 한 엄의 싱그러움을 보면서 닮아갈 아이. 김엄마스스로에게 또 아이에게 원하는 것이다. 들한 일상을 싱하게 하려고 노력하 보면, 시행착오 끝에 아이에게 전해줄 꿀팁이 이만저만 쌓이는 것이 아닐 게다. 무기력은 또 오겠지만 목요일쯤 활력을 찾는다면 그것 또한 좋지 아니한가. 파스텔 톤 연한 오버핏 핑크 코트에 하얀 엘지 그램 노트북을 주한 , 어제 메모해 둔 문장과 지금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한 편의 에세이를 완하는 나도 활기찬 출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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