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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랑 Jan 16. 2024

당신은 누구를 구할 것인가?

트롤리 딜레마의 확장을 통한 사유


  트롤리 딜레마란 열차의 직진 방향에는 선로를 수리하고 있는 다섯 명의 인부가 존재하고 좌회전 방향에는 한 명의 인부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선택하는 딜레마이다.



오리지널 트롤리 딜레마


 결정자는 레버를 당겨서 좌회전을 할 지에 대해 결정하게 되는데 여기서 레버를 당기면 이 상황에 대해 개입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레버를 당기지 않았다면 이런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신의 개입 없이 자연의 뜻대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참사가 되겠지만 레버를 당긴다면 나 '때문에' 자신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누군가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현실적으로 다섯 명을 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공식적인 개입에 대한 죄책감 등을 고려하면 선택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게 잘 와닿지 않고 당연히 다섯 명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경우를 생각해 보라.



  변형적인 트롤리 딜레마인데 자신이 선로 위의 육교에 서있고 그 앞에는 뚱뚱한 남성이 묶인 채로 누워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기차가 지나가는 선로에는 인부 5명이 꼼짝없이 묶여있는 상황이다. 5명의 인부를 구하려면 우리는 뚱뚱한 남성을 밀어 그를 선로에 끼게 해서 기차를 멈추어야 한다.



변형적인 트롤리 딜레마


   이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첫 번째의 딜레마 상황보다는 선택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상황은 공식적인 개입을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면대면 접촉을 통해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는 들리지 않던 그의 미친 듯이 헐떡이는 호흡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이제는 개입의 유무만이 아니라 심지어 '거리감'까지 고려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감'이란 이렇다. 중력이 감소함은 지구 중심과의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 지구와 멀어질수록 중력의 힘을 덜 받는다. 한국에서의 칼부림은 무섭고 감정이 격양되지만 미국에서의 총기난사는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이에 동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하여 절대적인 숫자의 크기와 우리의 감정이 비례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 다 고려해 보아도 아무래도 5명을 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이 경우를 생각해 보아라. 당신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가? 키운다면 이 상황을 한 번 고려해 보아라.




  당신의 집에서 불이 났는데 한 방에는 일면식 없는 갓난아이가 있고 다른 한 방에는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애완견이 있다고 가정하자.


새로운 딜레마


  한쪽만 문을 열어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할 것인가?


반려견을 키우지 않는 사람이라면 보통 갓난아이를 선택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은 동일시될 수 없고 차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절대적인 우위가 존재한다고 여긴다. 이 주장은 법률 등의 현재 사회적 합의로서 어느 정도 통하는 말이다. 만약 인간과 동물의 죽음이 서로 동일시된다면 인간 1명과 동물 2마리 –예를 들어 생쥐 2마리–를 구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생쥐를 구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지 않겠는가. 동물 중에서도 인격체/비인격체로 구분하여 우위를 판단하려 하는 방법도 존재하지만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또한 이 선택이 틀렸다고 하지는 않겠다.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갓난아이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예상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려견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오랜 시간에 걸쳐 대략 10명의 반려견을 키우는 친구들에게 물어봤는데 10이면 10 다 반려견을 구할 거라고 말해서 그렇다.–당연히 타당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냉철하고 현실주의적인 녀석도 반려견을 구한다고 해서 놀랐다. 나는 반려견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그런 감정을 못 느껴 처음에는 공감을 못하고 친구들을 힐난하기도 했다. 이 에피소드에 대해 반려견을 가진 이들이 내게 비난을 한다면 90도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겠다. 나도 그 당시 나의 사고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한다. 지금 말하려는 건 반려견을 가진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사유에서 비롯된 나의 논증이다.



새로운 딜레마의 변형


  만약 이 딜레마에서 키우는 반려견을 자신의 돈 10억 원으로 치환한다고 하면 당신은 자신의 돈을 지켜낼 것인가 아니면 생판 모르는 갓난아이를 구할 것인가? –여기서 돈으로의 치환은 반려견의 가치를 시각화하기 위해 꺼낸 것이다. 당연히 주인의 입장에서 반려견의 가치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무한의 가치를 지님에 공감한다. 반려견을 키우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시키고자 이런 개념을 꺼낸 것이므로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이전 딜레마에서 갓난아이를 선택한 이들은 이 정도 됐으면 약간 고민을 할 것이다. 돈이 궁한 자라면 숨도 안 쉬고 10억 원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반려견과 10억 원은 주인에게 엄청난 가치를 가지지만 사회적 합의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과 비교해서는 가치가 낮다. 둘은 유사하게 비교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할만하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모르는 갓난아이를 구하지 않고 반려견을 구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모르는 아이 대신 자신의 돈 10억 원을 지켜내는 사람 또한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고로 키우는 반려견을 선택한 사람들은 반려견에 대해 대단히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므로 그들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딜레마에서 언뜻 보면 비합리적인 선택이라 느끼는 데에 있어서도 약간의 사려가 있다면 그 선택에 충분한 공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려견도 그렇고 10억 원도, 한국도 심지어 뚱뚱한 남성도! 당신 앞에 존재한다면 존재에 대한 원근감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는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판단이기에 선과 악으로 구별 짓기 힘드며 나는 더 나아가서 이 판단에 대해 존중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제 원점으로 되돌아가보자. 오리지널 트롤리 딜레마 상황에서 레버를 당기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레버를 당기지 않는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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