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까지 돕고 살아야 하는가
독일에 있을 적에 친해진 마리아라는 우크라이나 친구가 하나 있다. 전쟁 이전부터 유학 생활을 시작했고, 발발 이후 2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리아는 가족들을 현지에 남겨둔 채 맘고생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베를린 길거리에서 울리는 작은 폭죽 소리마저도 듣기에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당시 치솟은 물가에만 가슴 아파했던 나는 마리아와 친해지면서 이 전쟁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공감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와 그 가족의 인생이 뒤흔들리고 있구나, 무엇보다 한국에 전쟁이 재개된다면 나도 이와 다를 게 없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에게 이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되었던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국제적 불평등에 모두가 반드시 관심 가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멀리 떨어진 존재의 사건을 접하며 공감하는 경험은 최근 몇 백 년을 제외하면 인간에게 너무나 생소하다. 먼 나라의 전쟁은 알 리 만무했고, 하물며 두 이웃 부족 간의 싸움보다 옆집 사람이 맹수에게 물려 죽은 일이 내게 더 중요한 생각거리가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보통의 현대인 또한 이상적이게 이타적이거나 희생적이지는 못하다. 당연하게도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특정 사고를 강요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단지 각자 자신의 경험에 따라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 선택지가 없다고 본다.
마리아에게 가끔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들으며 나름 위로를 해주고 있다가, 최근 필리핀 여행에서 보았던 현지인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이 더해져 생각이 깊어졌다.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가? 모두의 삶이 공평해지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나? 공평하게 끌어올리면 모두가 행복한 것인가? 불행과 행복 사이의 변곡점은 어디인가?
가까스로 수렴한 결론은, 노력해도 행복해지기 힘든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적금이 만기가 돼서, 이 기회에 기부를 했다.
사람들이 남을 돕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나의 경우처럼 경험을 통한 공감에서 기인한 행동이 있을 것이고 나중에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기 위해 하는 행동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이든 간에, 인간이라면 더불어 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돕고 사는 것이 적절한 걸까?
표지사진: Unsplash의Aleksandra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