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손끝이 여물지 못하였던 나. 미화 씨의 살뜰한 보살핌으로 자랐다. 어쩌면 미화 씨는 내가 성장하면서 일어나는 비교적 평범했을 여러 일상의 문제들. 그런 것들에 대해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해결해 볼 기회를 자유로이 주지 않았을는지도.
중학교에 입학하여 교복을 입기 시작했을 때. 내가 다녔던 학교는 학생용 고탄력검정 팬티스타킹을 신었어야 했다. 등교 준비를 하는 나를 잠시 바라보던 미화 씨는 "아휴 ~ 이리 내봐 , 엄마가 입혀줄게. 이러다 학교 늦겠다. 얼른 엄마가 교복까지 입혀줄 테니까 후다닥 입고 아침 먹자."
미화 씨가 애지중지 기르던 수많은 군자란 화분과 난초화분 따위 화초만큼 나는 그녀의 손끝에서 자라났다.
안타깝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크게 나아질 것이 없었던 듯하다. 다녔던 고등학교는 교복 블라우스 깃위에 , 자줏빛 공단으로 된 끈을 리본으로 만들어 매야 했다. 리본을 매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 미화 씨에게 교복 리본을 매어 달라며 당연한 듯 맡기곤 했다. 그때 왜 미화 씨와 나. 그토록 쉬운 리본 매듭 묶는 법을 가르쳐 줄 생각과 배워볼 생각조차를 하지 못했을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매사에 대체로 엉성한 나로선 도저히 미화 씨가 매어준 단정한 매듭을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어쩐 일이었을까. 고등학교 1학년 2학기가 끝날 무렵 반 친구 중 한 명에게 예쁘게 리본 묶는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날 내 손끝으로 만들어낸 첫 리본은 그저 황홀할 뿐이었다. 누군가에겐 어처구니없이 웃기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내가 첫 아이를 낳고선 기이하고 끈끈한 모녀간의 행동은 더욱 볼만해졌다. 미화 씨는 나의 몸조리와 갓난아기를 돌봐 주었는데 , 아이가 백일이 되도록 내손으로 씻겨 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 주변에선 혹, 미화 씨의 늦둥이가 아니냐는 마냥 웃지 만은 못할 우스갯소릴 하기도 했다. 아기는 대략 네 살 가까이 우리가 사는 경기도와 미화 씨가 살고 있는 강원도를 바쁘게 오가며 그녀 손끝 가까이 에서 자랐다. 물론 나 또한. 무척 징그럽게도.
어느덧 나의 아이들은 열네 살 , 열한 살이 되었다. 어찌어찌 그러는 사이 나의 생활 수행능력이랄까. 이를테면 생활지능도 함께 자라 제법 높아져버렸다.
아. 물론 , 지금까지도 썩 야무지지 못한 나는 이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꽤나 자주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어릴 시절 나의 경험을 뼈저리게 곱씹으며. 내 아이 둘을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어른으로 길러낼 수 있도록 , 나름 애를 써보고 있다.
스스로 방정리, 각자의 옷장정리, 식사 전 수저 놓고 물컵에 물 따라놓는 것 따위, 식사 후 식탁뒷정리, 현관신발정리. 세탁기 탈수 후 건조기로 옮기는 일, 때로는 청소기 돌리기 , 밀대 걸레로 방 닦기 등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일들과 본인이 해야 할 일들은 최대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때론 그것이 미숙 할지라도.
이쯤이면 혹시 태생부터 게으른 내가 순전히 귀찮아서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함께 하길 강요. 구렁이 담 넘어가듯 떠 넘기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지도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뜻이 있어 시작하게 된 것들이었음을 굳이 환기시켜 본다. 곱씹어 나열하고 보니 어쩐지 스스로에게 머쓱해졌기 때문이다.
자라는 내내 손끝이 야무지지 못하고 엉뚱하여 웃지 못할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일으켰던 아이를 기르느라. 이래저래 애태웠을 미화 씨의 육아신념 또한 존중하며 , 감사할 따름이다.
미화 씨의 육아에도 뭔가 나름의 뜻이 있었을 테니까.
그랬던 미화 씨가 이제는 누구보다 자신의 인생을 즐겁고 활기차게 지내길 바랄 뿐.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이런 마음. 그저 내 맘 조금 편해보고자 미뤄보는 작고 하찮은 이기적인 마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