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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꾼도시워킹맘 Dec 26. 2022

눈으로 먹는 보약

꺼내먹어요. 최대한의 용량으로.

보약 : 인체의 생리기능의 부조현상에서 오는 신체의 허약상태를 도와주는 약물


봄, 가을이면 보약을 달인다. 좋다는 한약방에서 약을 한제 받아와 약재 한 줄기, 그윽한 향내라도 날아갈까 소중하게 열어본다. 최신식 약탕기도 없다. 옹기로 만든 구식 약탕기에 약재를 넣고 약수를 붓는다. 짙은 한약방 냄새가 퍼져가고 모락모락 김도 뽀로록 올라온다. 약재가 보약이 되도록 폴폴폴 끓는 내내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끓어넘칠까, 졸아들진 않을까 마냥 지켜보고 앉았다. 한 방울이 흐르면 아이의 건강도 한 방울만큼 모자랄 것 같아 양손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지만 다부지게도 약을 짜낸다.



"또 한약이야? 먹기 싫어. 쓰단말야."

"식기 전에 빨리 먹자. 그래야 튼튼해지지. 코 막고 얼른 마시고 사탕 먹자, 응?"



아파서 병원 가는 게 일 년에 한두 번 남짓인 지금과 달리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다고 한다. 지방 광역시에 살던 어린 시절 서울대병원까지 진료를 올 정도였다니 엄마는 얼마나 애가 탔을까. 아픈 아이를 데리고 기차와 버스를 타고 병원에 오가며, 검사를 받으며 잔뜩 긴장해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는 아이를 보면서 속상했을 마음이 이제야 헤아려진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봄, 가을 계절이 바뀔 때면 늘 우리 집에서는 보약 달이는 약기운과 사랑이 담뿍 담긴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사춘기가 되고 보약 먹으면 살찐다는 불만에 그만둔 것인지, 청소년기가 넘어가며 잔병치레도 줄고 건강해진 탓일까. 언제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더 이상 우리 집에선 한약냄새가 나지 않게 되었다.






유난히 힘든 날이 있다. 인체의 생리기능 부조현상에서 오는 신체의 허약 상태는 분명히 아니다. 일이 풀리지 않아서, 모진 말을 들어서, 스스로가 성에 차지 않아서, 노력이 너무 허망해서, 내 맘 같지 않아서, 나를 몰라줘서.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 같고 포기하고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특 치면 후두둑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그런 날, 몸이 아닌 멘탈이 지치는 날이 온다. 마시는 보약 열 대접이 무효한 그런 날 말이다.



언제쯤이었는지, 무슨 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가슴이 답답하고 꽉 죄어오는 듯했다. 한숨이 나오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회사일이었는지, 개인적인 일이었는지, 아니면 그 둘 다였는지 모르겠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화장실로 들어가 맨 구석칸에 들어앉아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가슴팍 옷깃을 쥐어뜯었다. 통곡이라도 하면 나아질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댈까 그 순간에도 눈치를 보며 울음을 꾹꾹 넘겨 삼켰다.





몇 분이 지났을까. 이대로는 안될 것 같으니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는 건 싫었다. 눈물을 닦고 다른 생각을 해보려 애썼다. 맛있는 음식, 여행 갔던 기억... 그러다 핸드폰의 사진첩을 열었다. 거기에 있었다. 눈으로 먹을 수 있는 내 보약이 말이다. 바로 아이의 사진이었다. 말간 표정으로 나를 향해 온전한 믿음과 행복을 보여주는 아이의 웃음이었다.


보기만 해도 좋은

 




그렇게 한 장 한 장, 눈으로 먹는 보약을 꼭꼭 씹어 먹고 훌훌 털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또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얼마간의 동력을 얻고서 말이다.



태어나 20년 가까이는 엄마가 달여준 보약을 먹고 살아왔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먹게 되는 눈으로 먹는 보약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저는 그렇게 엄마에게서, 아이에게서 얻은 보약의 힘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의 눈으로 먹는 보약이 무엇일지 간직해두었다가 마음이 힘든 날에 꺼내어 드셔보시길 바랍니다. 눈으로 먹는 보약은 최대허용치가 없으니까요.




참, 꼭 눈으로 먹을 필요는 없겠지요. 귀로 먹는 보약도 좋고, 감촉으로 느끼는 보약도 좋겠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당신만의 보약을 찾으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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