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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Nov 23. 2022

나의 가난과 그리고 외로움 - 1

혼자인 사람

 우리 집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내가 14살 즈음, 베트남에 간 지 약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위해 어린 나를 작은 고모 댁에 맡기고 베트남으로 먼저 떠났다. 그 이후 몇 년 뒤 나 또한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으로 거처를 옮겼으니 우리 가족은 아버지 사업 차 베트남으로 이민을 간 셈이다. 허나, 운 나쁘게도 내가 베트남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업은 실패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은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릴 적부터 공부를 곧잘 했기에, 없는 형편에도 할머니가 애써가며 뒷바라지한 결과 4년제 대학의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 위로 세 고모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사회로 나가 일을 시작했던 반면, 아버지는 재수까지 해가며 대학을 갔던 것이다. 졸업 이후, 아버지는 곧바로 대기업에 취직했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나를 낳았다. 우리집은 강남의 중심에 있었고, 무남독녀 외동딸인 나의 취미는 발레와 바이올린 연주였다.


 그렇게 가난한 집에서 자수성가하여 성공 가도를 달리던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나와, 재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어머니, 그리고 둘 사이에 낳은 갓난아이까지 있었다. 아버지는 당신만을 바라보는 가족들을 위해 사업 재기를 꿈꾸며 이런저런 방법을 모색하였지만 모국이 아닌 베트남에서의 생계유지는 쉽지 않았고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늘어난 빚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불가능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새어머니와 다투고 한인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옮겨가 혼자 살게 되었는데, 학비는 고사하고 매달 30만 원가량의 하숙방 월세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잦아져 하숙집 사장님께 혼이 나는 일이 많았다. 당시 살던 하숙집은 호치민 지역 한인촌에 위치한 작은 짜장면 집이었는데, 사장님은 내 사정을 감안하여 하숙비를 깎아주고 식사를 챙겨주는 등의 온정을 베풀면서도 어리고 가난한 나를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인지 종종 막말을 하거나 집에서 쫓아내 버리겠다는 협박을 해 어린 나에게는 적잖은 스트레스였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는 교복 안에 받쳐 입는 끈나시나 속바지를 살 돈이 없어 항상 맨 몸에 교복만 입고 다녔다. 베트남은 겨울이 없어 비싼 패딩이나 코트를 사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평일에는 항상 교복을 입고, 주말에는 내가 용돈을 모아서 쇼핑몰 세일 코너에서 산 티셔츠 한 장과 반바지 하나를 입고 다녔다. 그즈음 나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매주 주일마다 항상 똑같은 옷을 입고 교회를 갔다.


 나는 친구들이 가진 최신형 핸드폰이나, 노래가 나오는 전자사전이나, 브랜드 메이커 운동화가 없었다. 나는 친구들이 가는 수학 보습학원이나 영어 학원을 다닐 수도 부족한 과목의 과외를 받을 수도 없었다. 나는 남들처럼 가족끼리 외식을 갈 수도, 반찬투정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학원을 가는 친구들을 보내고 작은 하숙방에 앉아 교과서를 읽고는 했다. 나는 문제집을 살 돈이 없어 다른 공부는 하지 못하고 교과서와 인터넷에서 무료 온라인 강의만 볼 수 있었다. 공부를 다 하고 다음날 학교 갈 준비를 할 때면 가정통신문에 부모님인 척 대신 서명을 했다. 성적이 나온 날에는 성적표에도 스스로 서명을 했다. 성적이 떨어져도, 성적이 올라도, 꾸짖거나 칭찬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일 다음 날 입을 교복을 스스로 다리고 걸어두면서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교복을 다려주셔서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숙집은 아래층이 식당이라 그런지 종종 바퀴벌레가 방까지 올라와 내 몸을 기어 다니곤 했는데 그런 날은 밤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평범한 집안에서 엄마, 아빠와 아웅다웅 살아가며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게 살아가는 친구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당연하게 학원을 가고, 영어를 배우고, 문제집을 푸는 게 싫은 보통의 학생이고 싶었다. 엄마가 해 준 밥이 싫어 반찬투정을 하고, 가끔은 가족끼리 외식을 하는, 시험을 보고 나면 성적표를 기다리는 엄마가 있는, 몰래 용돈을 쥐어주는 아빠가 있는, 나를 걱정하는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보통의 학생이고 싶었다.


 그러나 하교한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외로움이, 쓸쓸함이 미치도록 싫었다. 쪽팔리고 서러운 가난함보다 그 외로움이 죽도록 싫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오지 않았다. 나는 친구네 가족에 끼어 사진을 함께 찍었다. 졸업식이 끝나면 다들 가족끼리 밥을 먹으러 가는데, 내가 갈 곳 없다는 사실을 아는 한 친구네 어머니가 나를 챙겨주어서 친구네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진심으로 감사했지만 동시에 나는 그런 군식구가 되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재혼한 아버지의 새로 꾸린 가정에서도 나는 그랬고, 맡겨져서 몇 년을 자랐던 작은 고모 댁에서도 나는 그랬고, 하숙집 아저씨, 아줌마네서도 나는 온전한 가족의 구성원이 아닌 군식구, 끼어든 눈엣가시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는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같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마치 혼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나는 혼자여야만 하고, 그 어디에도 온전한 일원으로서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나는 내 깊은 상처로부터 이루어진 이런 거짓 확신들의 속삭임 앞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싸운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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