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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컬러스 Dec 14. 2022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회피형 인간의 하루

아침부터 마음은 비장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청소를 시작했다.

(10시가 넘어야 시작하던 청소를, 건너뛰는 날도 있는 청소를 회피형 인간이 9시 전에 시작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아이들의 문제집, 각종 프린트물, 잡동사니까지 이미 식탁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인 식탁 위를 정리해 본다.

독서대엔 어제 읽다만 책이 펼쳐져 있고, 얼음컵에 시원한 박카스도 한병 부었다.

노트북을 켜고 유튜브를 들어가 essential 채널을 검색한다.

12월이니 크리스마스 노래를 들어볼까?

'재즈 캐럴과 함께 하는 연말 ㅣ 분위기 있는 크리스마스 BGM'을 재생시킨다.



자, 모든 준비는 되었다.

이제 글만 쓰면 된다.


갑자기 배가 고픈 것 같다.

냉장고에 개봉한 지 오래된 오리고기가 생각난다.

엄마는 맛이 변하려고 하는 음식 처리 전문가다.

혹여나 아이가 아프면 안 되니 절대 아이에게는 먹일 수 없다.

(엄마는 이 정도쯤이야 먹고 탈이나도 금방 이겨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얼른 내가 처리해야지.


그냥 구워서 먹기는 뭔가 아쉽다.

(먹는 거엔 어찌 이리도 회피형 인간 캐릭터가 자취를 감추고 진심만 남는지 모를 일이다)

오리고기 요리를 검색해본다.

오호라~ 오리고기 볶음 고추장 비빔밥. 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다.

파 송송, 양파 총총, 다진 마늘 듬뿍~

오리고리와 함께 달달 볶고 고추장을 넣어 함께 볶아준다.

오리기름과 고추장이 섞이니 벌써 군침이 돈다.

마지막으로 올리고당 한 바퀴 휘리릭.

비빔밥에 달걀프라이가 없으면 허전하지.

달걀프라이까지 올리니 근사한 한 그릇 식사 완성이다.


자연스럽게 넷플릭스를 연다.

재벌집 막내아들은 다 봤고, 오늘은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며 눈물 짜고 싶지 않으니 패스.

가볍게 깔깔 웃을 수 있는 아는 형님으로 골라 재생한다.



옛날부터 혼자 티브이 보면서 밥 먹을 때가 나는 가장 행복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MBTI가 유행이길래 해보니 내향적인 I형 이더라는 사실)

밥을 다 먹었지만 넷플릭스는 꺼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다음화를 누르고 있는 나의 손가락.


"띠리 띠리리~ 띠리 띠리리~~"

벌써 아이들 하교시간이라고?

????????????

저기요. 제가 브런지 작가가 되었거든요.

야심 차게 '바닷가 세컨하우스 로망 실현기' 매거진을 연재중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고요.


그 뒤의 일상은 머 상상하는 그대로다.

첫째에게 오늘 할 수학 문제집을 시켜두고, 둘째의 받아쓰기를 불러준다.

아이들에게 노릇하게 구운 롤소세지를 간식으로 대령한다.

지지고 볶도로 싸우는 두 녀석을 뜯어말리고 중간중간 카톡을 확인한다.


왜? 벌써 밖이 어두운 거지?


아, 결국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많은 것들을 했지만 멋진 브런치를 가꾸어 보겠다는 나의 목표를 위한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이 아니라 '오늘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날이 일주일에 6일쯤 된다.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에 나오는 문구가 떠오른다.

'시간이 흐르고, 이슬아는 글을 쓴다. 자정이 다가올수록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쓴다. 그것은 이슬아가 쓰는 글이라기보다는 마감이 쓰는 글이다'


갑자기 위로가 된다.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회피형 인간은 이렇게 오늘도 자기 합리화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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