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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snow Mar 02. 2023

그저 배부른 한 상이 낫구나




아주 오랜만에 할머니에게 다녀왔다.

서 너 달에 한 번씩 이 길을 다닌 지가 벌써 10년이 넘다.

느 요양시설처럼 할머니가 계시는 이곳도 한적하고 외진 곳에 있어서 길을 따라 들어서는 마음까지도 구불구불 편치 않은 생각을 이어가게 만든다.

코로나가 터지고 3년 동안은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면회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다른 면회 가족들과 시간이 겹치지 않도록 미리 전화를 하여 주말 30분 간격의 면회시간을 예약해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코로나의 기운도 많이 꺾이고 실내 마스크착용 의무화도 완화가 되었으니 대면 면회가 가능하다고 했다.




유리문 밖에 서서 들여다보는 게 더 나았을까?

간호해 주시는 분의 부축을 받고 두 손으로 워커를 밀어내며 면회실로 들어오는 할머니를 몇 달 만에 보면서도, 더군다나 이렇게 실내에 들어와서 본 것은 몇 년만이기에 냉큼 다가가 손을 잡거나 한번 가볍게 안아릴 만도 하건만.

부축을 받으며 아주 느린 속도로 할머니가 밀고 있는 워커가 면회실 의자에 닿을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저 짧은 인사 한 마디만 건네며.

"나 왔어."


걸음을 지탱해 주는 워커를 앞에 두고 의자에 기대앉아 이제는 불수의적으로 흔들리는 몸을 제힘으로도 멈출 수가 없는 아흔이 넘어버린 할머니 옆에 앉아있자니 무거운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직 차가운 겨울기운이 가시지 않은 2월 말, 할머니 옷이 얇지는 않은지 윗도리의 겹만 살짝 만져볼 뿐, 흔들흔들 힘없이 까딱거리는 몸 얹어줄 온기 하나 없는 메마른 나무처럼 그렇게 할머니 옆에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내 마음이 나에게조차 너무 차갑게 느껴져서 글픔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나에게 그 순간이 또렷이 기억에 남을 정도면 네, 다섯 살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할머니에게 무수히 많이 들었던 그날 나는 세 살이었단다.

처음 할머니 집에 내가 온 날.

당시 아직 어린 중학생이었던 작은 아빠가 나의 옷가지가 든 가방을 짊어매고 내 손을 잡고 할머니집이 있는 작은 시골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는 늘 채소를 파시는 동네어르신들이  몇 분 앉아계셨는데 그곳 앞에서 처음 할머니를 마주했던 기억이 다.

내 볼을 살짝 꼬집으시며 한 번은 쓰다듬어주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할머니가 나를 아프지 않게 쓰다듬어주었던 것은. 적어도 내 기억에서는.

우리 집 동네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나무보다도 더 대쪽 같은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아들의 고됨을 덜어내 주기 위해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핏줄이니 손녀 둘 내가 키우겠다고 큰 짐을 본인의 삶으로 옮겼지만 그렇다고 반갑고 귀하게 여길 존재는 아니었겠지. 그렇게 내 나름의 씁쓸한 정리를 해놓은지 오래다.  

뭐가 그렇게 서럽고 아쉬웠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기억할 수 없지만 시골집에 온 그날부터 거의 3년 동안 나는 하루 세 번 밥때가 되어 할머니가 밥상을 들고 방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기만 하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문 밖으로 쫓아내 보기도 하고 바늘통을 꺼내 들며 계속 울면 바늘로 입을 찌를 거라며 혼을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6살이 되던 해 큰 교통사고가 나서 한 달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서 내 속절없는 밥상 울음은 끝이 났다.

좀 쓰다듬어주지.. 한 번쯤은 보듬어도 줘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물어나 봐주지. 왜 그렇게 모질게만 하셨던 건지.

그 뒤 할머니는 나를 키운 본인의 세월을 회고하실 때마다 내가 밥때가 되면 그렇게도 울어재꼈다는 이야기를 골백번도 더 하셨지만 그래서 당신이 나를 달래고 어르느라 애썼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으리라.

할머니는 나의 부모였고 나의 고향이었고 그 어린 시절 자리를 지켜 유일한 어른이었다.

어린 나의 어떤 선택도 없이 추위를 피하여 가게 된  품이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따뜻하지는 않았다.

크는 내내.

모든 것에 아들이 우선이었던 어머니의 삶을 살아온 할머니는 결국은 이렇게 노년의 끝자락을 외롭게 걸어가고 있다. 그렇게 귀하디 귀하게만 대했던 아들들에게 할머니가 받 것은 무엇인가 싶다.


옆에 앉아있는 나에게 연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 하나 남아있지 않은 마른 입으로 우물우물 쏟아내는 말들을 알아듣기가 들다.

유리문 밖에서 나의 어린 딸들이 깔깔거리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시며 는 말만 유일하게 알아들었다.

"아고 이쁘다 아고 이쁘다"  

할머니의 두눈가가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선택할 수 없는 세상을 안고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참 즐겁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렇게도 고집스럽이기적인, 부끄러운 20대를 보냈나 싶고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다.


마흔이 넘어버린 지금에 와서 어린 시절이 그래서 이다라고 무슨 핑계를 대며 누구를 원망하겠냐만은 여전히 어려운 숙제를 하며 살아가는 듯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다.

순간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과제였고 지금도 때때로 경직된 내 모습들이  스스로에게 비칠 때면 허망함이 밀려온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이 과정을 과연 내가 잘 해내고 있는 것인지, 남들도 다 이렇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이런 내 모습이 괜찮은 것인지.

목에 걸린 돌 하나하나를 두 눈을 질끈 감고 억지스럽게 넘겨내듯  풀 수 없는 생각들을 수없이 혼자 접었다 폈다 하며 그렇게 삶의 숙제를 해나가고 있는 듯하다.




두유와 부드러운 간식거리를 잔뜩 담은 상자를 병실로 올려 보내고 필요하실 때 쓰시도록 봉투 하나를 할머니에게 건네주며 짧은 인사를 하고  돌아

"또 올게."


집까지는 넉넉히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그냥 가자니 허기가 질 것 같아 아이들을 데리고 요양병원 근처에 있는 보리밥집에 들어갔다.

둥근 쟁반에 담긴 소담스러운 반찬들이 한 상을 가득 채웠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보고 왔다는 든든함과 안도감, 그래도 내게는 고향 같은 할머니가 계신다는 편안함.. 그런 마음은 모르겠다.

그저 내 허기를 달래주는 이 보리밥 한 상이 지금 이 순간은 그 무엇보다 든든하고 나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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