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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Erika Oct 28. 2023

'영주권'이 뭐길래

이민이라는 수단이 목적이 되지 않기를 


이민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렵다. 단순히 이민 정책이 어린 연령을 선호해서가 아니라, 언어, 사고방식, 문화 적응의 면에서 그렇다. 한국에 있을 때는 가장 한국의 문화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라고 믿어온 사람도 해외에 나오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한국 문화에 젖은 사람이었는지 깨닫곤 한다. 싫어한다고 믿었던 문화로부터 얼마나 많은 혜택을 입어왔었는지는 그 문화를 떠났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 나라에 산 시간이 길수록, 그리고 더 낯선 곳으로 갈수록 타국에 온전히 스며들어 뿌리를 내리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캐나다에서는 유학을 마치면 워킹 퍼밋을 받을 수 있는데, 나도 졸업 후 직장 생활을 경험해 본 다음 한국에 돌아갈 요량이었다. 지금처럼 토론토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살아가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거나 계획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코비드 팬데믹이 터졌고 비행기 티켓이 취소되고 말았다. 토론토에 머물면서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영주권을 신청했다. 나오면 좋고 말면 말지 뭐 하는 식이었다. 내 케이스는 크게 복잡하지 않아 대행사 없이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했다. 별 탈 없이 영주권을 받았고, 하던 일을 쉽게 멈출 수 없어 한국행을 조금씩 미루다가 결국 토론토에 눌러앉게 되어 버렸다. 도망가려면 진작 도망갔어야 하는데, 하하하...


물론 나는 다행히 이곳에 잘 정착했고 이곳 생활이 내게 더 잘 맞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갔다면 그것대로 또 잘 정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캐나다에 머문 시간이 오래될수록 나와는 다른 다양한 사람들의 케이스를 본다. 유튜브만 봐도 영주권을 위해 큰돈을 들이고 오랜 시간 몸과 마음을 고생하다가 영주권을 받지 못해서 돌아가는 경우도 많고, 또 영주권을 받았지만 기대했던 삶과는 달라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 이민에 성공하고 잘 정착을 했든 그렇지 않든, 둘 다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건 자명한 사실 같다. 


혹 타국으로 이민을 계획하고 있거나 시도 중인 사람이 이 글을 본다면, 난민이나 망명, 합법적인 동성 간의 결혼과 같이 타국에 정착하는 것이 정말 유일하거나 마지막 선택지인 경우가 아닌 이상, '이민' 그 자체를 삶의 목표로 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민을 꿈꾸고 해야 하는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야 다르겠지만, 해외가 현실 도피처가 될 수 없고 세상 어디에도 낙원이란 없다. 이민을 통해 내 나라에서 겪어온 문제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신 내 나라였다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아니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다른 문제들을 마주해야 한다. 특히 언어는 삶의 질과 직결된다. 언어는 그 나라에 와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배우고 알고 올 때 그 나라에서 더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인종차별이 아니라 언어 차별'이라지 않는가. 


또 '영주권'은 귀하고 감사한 기회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 온갖 부당한 일에 스스로를 상처받도록 남겨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주권을 받는 방법 중 캐나다 사업장에서 일을 하고 그들이 스폰서가 되어주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카테고리들도 있는데, 이를 악용하는 한인 사업장이 정말 너무도 많은 현실이다. 보통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곳은 한식당이나 사람이 없는 깡시골에 있는, 그리고/혹은 캐네디언들이 기피하는 직종의 일이 많은데, 이주공사니 유학원이니 하는 현지 사정 알 길 없는 사람들이 하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인터뷰 몇 번으로 한 번 와 본 적도 없는 곳으로 온 식구가 덜컥 짐을 싸서 와서는... 정말 갖은 고생을 다 하는 사연을 들으면 너무나도 안타깝다. 이 나쁜 한인 사업장들은 영주권을 인질로 잡고 노동법도 지키지 않는다. 캐네디언 고용할 능력이 없어 같은 동포 등쳐먹는 주제에 마치 자기들이 영주권을 주는 양 생색을 낸다. 


문제는 한 번 이민을 목적으로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올 엄두를 쉽게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들인 돈이나 시간, 노력 등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민에 실패했다'는 생각으로부터 오는 창피함과 자존심의 상처가 가장 크다. 호기롭게 한국을 떠났는데 다시 돌아간다면 한국의 가족, 친척, 주변 사람들이 저를 두고 패배자나 실패자로 보고 내릴 '평판'이 두려운 것이다. 자존심은 때때로 좋은 동기로 작용하지만 지나치면 눈을 멀게 하고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부당한 일을 마냥 참고 견디는 근로자들이 많을수록 '못된 사장님'은 사라지지 않으며, 근로자들은 '나쁜 선례'로 남는 불명예까지 얻는다. 온갖 수모를 수년간 겪은 후 마침내 '그놈의 영주권'을 받아 들었을 때, 몸과 정신은 이미 너무 많은 상처들로 돌이킬 수 없이 피폐해져 있고 망가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민은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다. 이민을 생각하고 떠났어도 하고 있는 일이든 공부든 생각하는 삶의 방향과 전혀 다르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 나라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것도 아닌데 왜 돌아갈 곳이 없단 말인가. 


한국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이 리셋이다. 그래서 이민을 원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이 겪어온 안 좋은 것들만 리셋이 아니라, 좋은 것들도 죄다 리셋됨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 '좋은 것'들은 잃기 전까지는 좋은 것이었던 줄도 모르는 게 훨씬 많다. 아무리 이민을 통해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해도, 이민은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 하나이지,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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