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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몽 박작까 Dec 07. 2024

71살이 된 엄마의 도전

                                          


 우리 엄마가 달라졌다. 초롱초롱 거리는 눈빛. 총명해진 낯빛. 에너지틱한 아우라. 기존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원래 엄마는 다리가 불편해 항상 힘들어하고 무기력해하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엄마는 최근 새로운 거에 '도전' 하고 계셨다.






 엄마는 내가 9살 때 큰 사고를 당하셨다. 횡단보도 건너려고 보도블록에 서있는데 아침부터 졸음운전하는 큰 트럭과 부딪혔다. 그 사고로 몇 미터 붕 떨어져 고관절 골절과 다른 곳들을 다치셨다. 그때 병원에서 본 엄마의 모습이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머리부터 발까지 안 다친 곳이 없던 그 모습. 사실 너무 무서워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 사고 이후로 엄마는 1년간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인공관절 삽입하는 수술을 권유받았는데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수술하고 5년마다 인공관절 바꾸는 수술을 해야 해 거부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수술 없이 이를 악물고 견인과 재활치료를 하셨다. 그 이후 쩔뚝거리며 걸으실 수 있었다.


 점차 좋아져 산에도 다니고 일상생활에 무리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또 좋지 않게 되셨다. 내가 첫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도와주셨는데 그때 일이 일어났다. 나 대신 아기를 안아 무릎을 굽혀 가며 달래 주다 무릎까지 안 좋아지신 거다. 그 이후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져 갑상선 기능항진증까지 왔다. 몸무게가 10kg이나 빠지고 1년간 아프셨다.


 갑상선 기능항진은 약물 치료로 괜찮아졌지만 무릎은 노화로 인한 퇴행성 변화와 오래전 고관절 사고가 맞물려 더욱 심화되었다. 원래 등산까지 하며 나들이를 즐겼던 엄마는 다리가 안 좋으니 집 앞 마트에도 가기 힘들어지셨다. 몸이 마음처럼 안 따라주니 자연스레 따라오는 무기력과 우울증. 집에서 집안일도 버거워했다. 아빠가 차를 태워 한의원, 정형외과도 번갈아 다니면서 지내셨다. 90세이신 우리 외할머니보다 더 힘들게 걸으셨다.






 엄마에게 활력을 주게 된 건 '수영'이었다. 수영 까진 아니고 아쿠아로빅이겠지. 무릎이 안 좋으니 살을 좀 빼야 하는데 운동도 할 수 없고 덜 먹는다고 빠질 연세도 아니고. 몇 년 전에 내가 엄마에게 수영을 권할 때는 '이 나이에 무슨 수영이야~ 됐어~ 너나 해.' 하면서 손사래 치셨다. 그런데 엄마 친구분이 '언니는 수영을 해야 돼. ' 라며 왜 안 하냐고 뭐라고 해서 바로 등록하셨단다. (역시 딸이 말하면 잔소리. 친구가 말하면 조언인가. 어쨌든 그 친구분 복 받으실 거예요^^) 그 길로 물속에서 걷기라도 하니 확실히 몸이 가벼워 운동도 되고 부드러워지셨나 보다. 물리치료나 침치료도 더 효과 있어지고. 아주 조금이지만 살도 빠져 가뿐해지셨다. 다리가 아파 집에만 있던 엄마가 활기를 찾았다. 할 수 없던 거에 도전해 성취감을 느끼니 엄마는 더 큰 거에 도전하셨다. 바로 '공부'다.


  엄마는 어릴 적 맏이로 태어나 부모님 대신 동생들 돌보고 밥 해먹이고 농사일을 하셨다. 자연스레 학교를 빠지게 되었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셨다. 어린 마음에 다른 애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었을 텐데. 맏이라는 이유로 외할머니가 못 가게 하니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 한이 평생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우연히 아는 지인이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소개해줬다. 다른 동네의 성당에서 하는 건데 노인분들을 위한 야학교가 있다고. 집안 사정이 안 돼서 공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곳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셨다.   


 사실 엄마가 학교를 다닌다고 얘기하셨을 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거리가 매우 멀었기 때문이다. 수영장도 버스 타고 가는데 오르락내리락하기 힘들어 아빠가 태워주셨다. 그런데 야학교는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서 또 버스를 타야 갈 수 있었다. 아빠가 그 멀리 태워다 줄 수도 없고. 그것도 일주일에 주 5일. 매일 가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그걸 다 버티고 계신다. 70 평생 공부하고 싶고 학교 다니고 싶었던 한을 풀기 위해.


 엄마의 다리가 극심하게 아파서 힘들었던 시기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엄마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70살이 돼서야 엄마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아 속으로 짠한 마음이 들었다. 어릴 적 엄마를 떠올려 보면 그 옛날 그렇듯. 먹고살기 바빴다. 항상 부지런하게 일하셔서 취미를 갖는다거나 배우고 싶은 여가를 즐기진 못했다. 항상 밖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바쁜 와중에 한 번에 몰아 집안 대청소를 하셨다. 맛은 살짝 부족하지만 집밥도 열심히 만들고. (이제 와서 보니 나보다 백만 배는 요리를 잘하셨다) 그래서 엄마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라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었다. 놀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게 천지다. 엄마 역할만 하는 것도 버겁다. 아이들 뒷바라지만 해서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있다. 그래서 나도 결혼하며 그만둔 일을 애들 좀 키워놓고 나니 다시 하고 싶어졌다.

 

 엄마의 여가 생활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떠올려 보면 신협에서 주관하는 산악회를 가셨다. 전국 유명산에 전국방방 곡곡 안 가보신 데가 없다. 신협에서 주관하는 노래교실에 다니기도 했고. 농협에서 주관하는 주부대학에 가신 적도 있다. 젊었을 때 엄마도 나처럼 다양한 것에 도전하고 해보고 싶어 하셨 던 것 같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연세가 들수록 움츠러지셨겠지. 신체적인 조건의 한계 때문에.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30년 전에 큰 교통사고가 발목을 잡으셨겠지.






 계단도 힘들게 올라가는데 버스, 지하철, 버스를 타야 하는 거리에 매일 가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주 5일 2년을 다녀야 중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는데. 중학교 검정고시까지 치르는가 보다. 거리라도 가까우면 좀 나을 텐데 너무 머니 몇 개월 다니다 못 버티실 것 같았다. 다닌 지 2개월이 지났을 때 엄마에게 물어봤다.


나 : "엄마 학교 잘 다니고 있어? "

엄마 : "응~ 잘 다니고 있어. 재밌어~"

나 : "힘들지 않아? 너무 멀어서. "

엄마 : "힘들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어. 다닌 지 2주가 지나니 죽겠어서.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어. "

나 : "왜? "

엄마 : "입학식을 성대하게 해 줬거든. 현수막도 걸고 풍선도 커다랗게 꾸며놓고. 꽃도 생화로 꽃다발을 2개나 받았어. 신부님 하고 선배님한테. 축가도 불러주고 강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와서 축하해 줬다니깐. 우리가 37기야. 입학생 8명을 위해서 졸업한 선배님들도 서울이나 동탄처럼 멀리서 축하해 주러 왔어. 엄마는 눈물이 다 나더라. 눈물 흘린 사람들 많았어. 그래서 미안해서 못 그만둬. 참고 다녀야 돼. "


 엄마는 그렇게 미안해서 더 책임감이 생기셨나 보다. 엄마 얘기를 듣고 있는데 씨익 미소가 지어진다. 항상 내가 엄마한테 얘기를 하고 엄마는 내 얘기를 들어주셨는데. 반대가 되니 기분이 새롭고 좋다. 그만큼 활기가 넘치고 생동감 있는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아서. 엄마는 그래서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다니고 계셨다. 집 안에만 있던 엄마가 '수영'에 도전했고 그래서 다음 스텝인 '공부'에 도전할 수 있었다.



'엄마 새로운 도전 온 마음으로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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