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글뱅글 돌아가던 세탁기가 다 되었다는 소리가 들린다. 세탁기에 있는 베개와 얇은 이불을 널려고 문을 열었다.
하얗고 괴상망측한 뭉텅이가 보인다. 바로 베개 솜이다.
원래 베개 같은 거 열심히 빨래하는 엄마가 아니다. 평소처럼 베개를 내버려두었으면 이 사단이 나지 않았겠지. 요즘 집먼지 진드기 알레르기가 있는 첫째가 증상이 심해졌다. 재채기를 하고 눈을 비벼대는 게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그래서 침대 프레임 위 먼지를 닦다가 급 베개를 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갑자기 엄마노릇 제대로 하는 것 같은 이 기분. 흥얼흥얼 허밍을 하며 안 그래도 미뤄뒀던 얇은 이불까지 같이 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안일과 살림 똥손인 엄마인데 요즘은 그래도 집안일이 잘된다 싶었다. 맨날 스트레스받던 공간을 정리하며 발전하고 있다고 자축하고 있었다. 갓 결혼한 새댁도 아니고 12년 차 엄마가 얘기하기엔 너무 더딘 속도라 민망하지만.
그런데 이런 상황과 마주하니 역시는 역시구나 싶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마음이 들었다.
'똥손이 금손되기가 어디 쉽나? '
'금손은 뭐 실수 안 하나? '
'내가 이럴 줄 알고 그랬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뭐~'
하며 씩씩대고 흥분된 마음을 달랬다.
베개는 총 3개였다. 하나는 첫째 베개인데 일체형 베개고 세탁 가능한 거였다. 두 번째 베개는 다이소에서 산 연두색 쿨링베개. 그리고 세 번째 베개는 둘째 애착 베개인 헬로카봇 베개였다. 이 세 개 중 세탁기 테러사건의 범인은 당연히 다이소 베개라고 생각했다. 3000원이었나 5000원이었나. 역시 '싼 게 비지떡이네.' 싶었다. 그렇게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커다란 솜뭉탱이를 건져 올렸다. 산산조각으로 갈기갈기 풀어져있는 솜뭉탱이가 많기도 하네 하면서 봉투에 담았다.
그런데 담다 보니 이상하다. 점점 솜은 사라져 가는데 연두색 쿨링베개가 멀쩡하다. 당연히 옆구리가 터져서 난리가 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상하다. 어떻게 된 거지? 첫째 베개는 베개를 통째로 세탁할 수 있는 거라 그럴 리 없는데? 불길한 마음으로 아이들 방에 갔다.
허거거걱. 네가 왜 여기 있니? 침대 위에는 얌전하게 놓여 있는 헬로카봇 베개 커버가 있다. 그 괴상망측한 솜뭉탱이의 주인은 헬로카봇 베개였다. 베개 커버를 빤다는 게 안에 있는 쿠션을 빨아 요지경이 된 거였다. 내 잘못이 아니라 다이소 베개 탓이라고.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대반전. 결국 요지는 내 잘못이었다니.
베개 잘 안 빠는 엄마인 게 여기서 뽀록난다. 아니 그래도 태어나서 베개 처음 빠는 것도 아니고 베개 커버만 빠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잠깐 귀신에 홀렸나? 이불 정리를 함께 해서 멀티가 안되었나 보다. 항상 이불 정리 후 베개를 올려 뒀던 습관이 여기서 나왔던 거 같다.라고 하기엔 궁색한 변명일 뿐.
아이들이 하원 전 베개를 빨고 얼른 말려서 밤에 다시 쓸 수 있게 하려고 했다. 솜뭉탱이를 치우고 나니 이제 곧 하원하는 둘째가 걱정되었다. 이 베개는 둘째의 애착 베개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9살인데 헬로카봇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 베개의 사이즈와 부드러운 솜이 좋아 4년째 쓰고 있었다. 중간에 천이 다 찢어졌는데도 못 버리고 있다가 버렸는데 결국 다시 새 거를 사도 똑같은 거를 살만큼 애정하는 베개였다. 그런 베개였기에 충격이 클 듯싶었다.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조마조마해하고 있는데 장난꾸러기 남편은 굳이 하원하고 있는 둘째에게 전화해서 얘기를 한다.
남편 : "환아~ 대박사건이야. 빨리 집에 들어와~"
진짜 못났다 못났어. 누가 철부지 아빠 아니랄까 봐 아주 까불이다. 영문도 모른 채 집에 들어온 둘째에게 내가 말했다.
나 : "환아~ 정말 미안해. 엄마가 환이 베개 깨끗하게 빨려다가 베개 커버가 아니라 솜을 빨다가 솜이 터져버렸어. 환이가 좋아하는 베개인데 정말 미안해. 엄마가 얼른 다시 시켰어. 내일 새벽에 온데~"
구구절절이 애절한 눈빛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둘째의 눈 동공이 흔들린다. 평소에 호불호가 분명하고 감정표현을 잘하는 아이기에 분노를 표현하거나 속상함으로 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두 번이나 미안하다고 얘기해서 그런가. 둘째는 당황했지만 이렇게 얘기했다.
둘째 : "엄마 왜 그랬어~ 환이가 아끼는 건데. 그래도 괜찮아. 이 베개를 넣으면 되겠다~"
둘째가 얘기한 베개는 커버 없는 일체형 베개였다. 조금 높다고 안 쓰던 거였는데 긍정적인 둘째가 이거를 넣으면 되겠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완성된 헬로카봇 베개. 조금 높긴 하지만 써보겠다고 한다. 미안해서 불편하면 다시 사주겠다고 하고 생각 잘했다며 폭풍 칭찬.
그렇게 대환장 베개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아이가 이해해 줬지만 여전히 미안한 마음에 냉동실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걸 꺼내든다. 바로 '곤드레 메밀전병'. 적당히 해동해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정성스레 올려본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게 하기 위해 뚜껑을 덮어가며 열심히 구워본다.
안정을 찾고 나니 빨래도 개고 아이들도 챙기다 보니 머릿속에 번뜩 생각나는 '곤드레 메밀전병' 설마 태운 건 아니겠지? 싶어 뚜껑을 열어보니 다행히 많이 타진 않았다.
그렇게 겉바속촉 곤드레 메밀전병이 완성되었다. 정성스럽고 예쁘게 자르며 맛있게 식으라고 후후 바람을 불어 본다. 베개 솜을 세탁기에 넣는 살림꽝 엄마이지만 아이들 사랑하는 마음은 우주최강인 나는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