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든 Dec 26. 2022

152-3-3-1

부평역 3-3


 인천지하철 1호선에서 서울행 열차로 갈아탈 때면 난 항상 부평역 3-3 위치에서 탔습니다. 지하에서 층계를 올라오면 간이매점이 보이고 거기서 몇 걸음 뒤 돌아가면 커피자판기가 있는데 거기가 한적해서 좋았습니다. 열차를 기다리며 서성거리다가 선로 쪽, 노란 점자블록을 따라 걸었습니다. 세모 모양의 금속판에 승강장 번호가 박혀 있었습니다. 3-3, 3-2, 3-1, 2-4, 2-3……. 10량의 열차 각 칸의 번호와 출입문 4곳의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문득 모든 만남과 관계가 몇 번 행과 몇 번 열의 교차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땅 위의 모든 공간이 숫자로 표현될 수 있고 고유번호를 지닌 모든 사람의 만남도 그럴 수 있을 겁니다. 1호선 전철 소요산역의 번호는 100번, 그로부터 52번째인 부평역의 번호는 152번이라는 걸 전철 노선도에서 확인했습니다. 152번 역사 3-3 지점에서 만나는 성인남녀는 주민등록번호가 1이나 2로 시작될 테니 그곳에서 내가 누구를 만난다면 152-3-3-1과의 만남이거나 152-3-3-2와의 만남일 겁니다.

 한 남자가 매점에서 신문을 사서 자판기 옆으로 걸어왔습니다. 그는 152-3-3-1이 되었습니다.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의 안내가 흐르자 그 남자가 내 두어 발짝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골이 가는 검정 벨벳 재킷은 단단한 상체를 잘 드러내주었고 주름이 세워진 바지와 손질된 구두가 세련된 차림이었습니다. 열차가 도착하고 남자는 출입문의 오른쪽으로, 나는 왼쪽으로 올라탔지요. 남자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더니 목적지에 다다라 내가 내릴 준비를 할 때 먼저 출입문으로 다가갔습니다. 아주 잠깐 152-3-3-1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퍼뜩 눈이 차갑게 빛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겨울 하늘의 별이 물기 먹은 듯 그렁거린다는 표현처럼 남자의 눈이 꼭 그랬습니다. 입술까지 앙다물고 있어서 저 남자에겐 어떤 삶의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출입문이 열리자 남자는 개찰구를 향해 빠르게 걸어 나갔습니다.      


 태양계의 9번째 행성이었던 명왕성은 ‘소행성 134340’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152-3-3-1이었다가 ‘나의 ○○’이었다가 지금은 지구별의 어떤 남자가 되었습니다. 별을 뭐라 부르든 그 자체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사람은 명명하기에 따라 관계가 결정지어집니다.      


 당신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싫어했습니다. 사랑받고 싶고 무조건적으로 수용되고 싶고 따스한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는 건 누구나 가지는 욕구일 텐데 당신은 그 말에 두드러기가 인다고 했지요. 지난날의 어떤 경험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기쁨과 행복이 넘칠 듯이 가득했습니다. 우연히 길모퉁이에서 얻은, 마지막이 될 것만 같은 사랑의 감정을 거침없이 불사르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모직코트 속에서 맡던 냄새, 그 안온함을 기억하고 있네요. 당신이 단추를 풀어 코트자락을 펼치면 내가 그 안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렸었지요. 그 깔끄스름한 직물에서 풍기는 드라이클리닝 세제 냄새가 좋았습니다.


 오늘도 부평역 3-3 승강장에 서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행여나 당신을 만날까 하고 기다리던 날들이 많았네요. 당신과 내가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눈빛만으로도 당신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다고 믿었고 드러내지 않는 상처도 다 감싸줄 수 있다고 믿은 것이. 눈빛의 소통이라거나 완전한 이해라는 것이 나의 오만이었음을 이제 압니다.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가 알아채 주기를 바라고 또 상대가 표현하지 않는 가슴속 말은 없는가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정작 귀 담아 들어야 할 말을 놓쳤습니다.

 3-3, 3-2, 3-1, 2-4, 2-3, 2-2, 2-1……. 점자블록을 따라 걷습니다. 뒤 돌아 다시 걸어갑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날과 똑같네요. 예전처럼, 기적처럼, 당신을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전철 기다리는 중. 예전처럼 우연이 여기서 당신을 만나는 기적을 바라게 됩니다-

당신에게 이 문자를 보내면 당신이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립니다. 한숨이 나오네요. 아직도 이렇게 공연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올 리 없는 당신이야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열차는 들어와 주어야 할 텐데 도착이 늦어지고 있네요. 간이매점 쪽으로 한 무리의 여자들이 올라옵니다. 그들 뒤로 남자도 한 명 보이는 군요.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방송이 들립니다. 승강장 안전선 쪽으로 다가섭니다. 저 멀리 열차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손이 떨립니다. 추위로 떠는 건지 휴대폰이 떠는 건지. 열차가 멈춰 섭니다. 귀에 휴대폰을 대고 열차 앞 쪽으로 달려가는 남자가 보입니다. 152-3-3-1 당신일까요? 열차 앞칸부터 훑어내려 오려고 그리 가는 것은 아닐까요? 출입문이 열렸습니다. 객차와 승강장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 발이 빠질 위험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탔을지도 모를 서울행 열차에 올라탑니다. 바람이 냉랭해서 겨울 하늘이 푸르디푸릅니다.


작가의 이전글 부평동 767-4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