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균형잡기

엄마의 워라밸

by 수아

회사에 다니지 않으면 좀더 여유가 생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바쁘지? 쓸데없이? 이런 푸념을 늘어놓으니 아는 지인이 '백수가 길바닥에서 죽는다' 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했더니 실제로 가장 한가할 것 같은 백수가 이런 저런 일에 관여하고 사람들도 시도때도 많이 만나고 오지랖을 떨다가 가장 바쁘게 지내다가 길바닥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농담이었다. (이후에 찾아보니 실제로는 '백수가 과로사한다' 는 표현으로 일반적으로도 쓰이는 듯 하다.)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이 말이 공감이 된다. 일을 다닐 때는 주변 사람들도 그걸 알아서 어느 선 이상의 부탁이나 연락이 덜하다. 관계나 사역(공동체의 필요)에서도. (물론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 들어서 그럴 여력도 안되지만) 내가 예상가능한 스케쥴과 테두리 안에서 내 삶이 유지, 관리된다. 개인과 일의 삶이 시간이나 공간적 측면에서 구분이 되고, 예측이 된다.


'일을 하지 않는' 엄마의 삶은 뭐랄까. 개인이나 타인에게도 약간은 열려있는 상태인 것 처럼 보인다.

개인적인 약속을 잡을 때도 일을 하지 않으니 그 선을 정하기가 어렵고 속한 공동체의 크고 작은 요청과 사역에도 선뜻 거절하기가 어렵다. 일도 안하는 데 뭐.. 라는 생각이 나 스스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든다.

그러다보니 아주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크고 작은 일정들이 끊임없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일들이 계속되다보면 어쩔 때는 주부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들(살림, 자녀양육, 아내로서의 역할, 딸로서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뒤로 밀리거나 뒤범벅이 되기도 하고, 내가 잘 살고 있는게 맞는지 현타도 온다. 특히 아이는 점점 커가고 어느 새 내 나이를 가끔씩 확인할 때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라기도 한다. 과연 앞으로 나는 또 다시 어떤 일들을 할 수는 있을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나?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






워라벨은 직장생활 할때에나 쓰는 말인줄 알았다. 젊은 시절, 회사에 처음 다니면서 일에 적응하고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을 때 일과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때의 워라벨은 딱 중간 지점인 줄 알았다. 일 반, 내 삶 반.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일 수록, 균형을 잡기 위해 애를 쓰면 이도 저도 아님을 느꼈다. 무슨 일이든 좋은 결과나 성취를 이루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정말 그 안에 내가 몰입하고 빠져있을 때, 틈만 나면 그 일에 열정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워라밸이라는 단어조차 의식하지 않을 때였다.


전업주부가 무슨 워라밸? 근데 전업주부도 워라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부로서의 삶을 살면서 집안을 관리하고 살피는 일, 아이의 발달 단계에 따른 성장주기, 아이의 입시, 재취업, 연로하신 부모님의 건강상태 에 따른 돌봄 등 어느 것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때로는 여러개의 이슈가 한꺼번에 내 삶에 몰려오기도 한다. 그때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어서, 또 잘하려고 하니 탈이 났다. 진정한 워라밸은 딱 중간지점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중요한 것에 후회없이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가 흘러가면 또 보이는, 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상과 우선순위에 내 마음과 시간을 쏟는 것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를 돌보고 사랑을 주는 일에 집중하고, 연로하신 부모님이 아프실 땐 그분들을 돌보고 살피는 일에 집중하고, 아이가 이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챙기고 엄마 손이 덜 필요할 때는 나 자신을 계발하고, 시간과 에너지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할 수 있는 시기에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내가 원하는 욕심대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맞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분별하고,

그 우선순위에 나의 삶을 후회없이 살아내는 것이 진짜 워라밸이 아닐까.


다하려니 잘 안되고, 무력하고 우울함을 느끼고, 아이를 다그치고, 날카로운 말들로 남편과 싸웠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고 유연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예전에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꼭 그 답만이 아니란 걸 하나씩 삶을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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