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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나 Jan 04. 2024

연락이 오면 불안한 사이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새 해가 밝으면 그 이튿날이 절친의 생일이다. 올해도 1월 2일 아침에 울린 캘린더 알람을 확인하고 카톡으로 이모티콘도 띄우고 선물도 전달하며 친구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생일을 챙긴 세월은 여고 시절부터 시작됐고 우리의 우정은 20년이 지나도록 이어지고 있다. 가까이 살지 않지만 종종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을 보낼 때도 사소한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누구보다 서로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는 사이다. 그녀는 친구지만 자매 같고 때론 언니 같은 나의 절친이다. 


이 맘 때 또 한 명의 생일 주인공이 있는데 바로 내 동생이다. 앞서 언급한 나의 절친의 생일이 연초라면 하늘 아래 유일한 내 피붙이 동생은 연말을 보내는 12월 30일이 생일이다. 친동생이니까 캘린더 앱에 등록하지 않아도 이 시기가 되면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하지만 친구에게 하는 만큼 진심 어린 축하 메시지도 작은 이모티콘 하나 보내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현실 남매다. 


거짓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세 살 터울의 동생이 태어나던 때를 기억한다. 내가 네 살 때 동생 때 태어났고 12월 말에 태어났으니 엄마가 동생을 낳고 산부인과를 퇴원하던 날은 막 다섯 살이 된 1월 초 이맘때였을 것이다. 아빠 차 뒷좌석에 앉아 병원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시간에 산부인과 문을 나서는 엄마와 고모가 생각난다. 갓 태어난 동생은 겉싸개에 쌓인 채 고모의 품에 안겨 병원을 나와 집에 왔다. 막 집에 도착해 누나가 된 나는 동생을 안아보려 했고 위험하다고 말리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일하는 엄마를 둔 어린 시절, 동생이 있어 심심치는 않았다. 심심할 수가 없었다 엄마 대신 내가 챙겨야 했던 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글을 떼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녀석이 받아쓰기를 20점을 받아왔을 때 '아, 내 동생은 바보인가, 나. 너. 우리 이 세 단어도 못쓰는 건 진짜 바보인데'라는 생각이 엄습했었다. 그날 이후 받아쓰기 급수표를 펼치고 동생에게 한글 맹연습을 시켰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100점을 받아온 기억은 없고 20, 40, 60점 정도로 우상향은 했던 것 같다. 


체구가 작았던 동생은 친구들의 괴롭힘에 자주 눈물을 보였다. 동생이 울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난 누나답게 동생 반에 쫓아가 내 동생을 울린 장본인을 솎아 내 호되게 복수를 했고 그 상황은 나도 그 아이의 눈물을 봐야 끝이 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엔 우리 집으로 걸려오는 동생 친구 엄마들의 항의 전화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아빠에게 혼쭐이 났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이 있었다. 반성은커녕 '감히 내 동생을 건드려? 어디 또 괴롭히기만 해 봐라, 머리털을 다 뽑아 놓을 거야!'라고 벼르며 학교를 다녔다. 미친 우애였다. 


엄마 대신 동생의 학교 숙제와 준비물 챙기기, 방학 때는 밥과 간식도 같이 챙겨 먹었다. 동생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다니는 학원에 1+1로 등록되어 다녀야 했다. 피아노, 미술, 속셈 학원을 같이 다녔다. 여러 학원을 다녀도 동생은 그 어느 과목에서도 재능을 내비치는 것은 없었다. 내가 알뜰살뜰 챙겼지만 마냥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자랄수록 서로 싸우는 날도 많았다. 왜 그렇게 먹을 것을 앞에 놓고 싸웠나 모르겠다. 둘 다 먹성 하나는 타고난 것인지 엄마가 맛있는 반찬을 해주면 한 젓가락이라도 더 집어넣으려 맹수들 마냥 먹어 치웠다. 엄마가 같은 그릇에 동일한 양을 나눠주어도 본인 반찬을 다 먹고 서로의 것을 탐하며 싸움으로 번지는 날이 많았다. 


중학교 때 일이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우리끼리 에버랜드를 가기로 하고 부모님께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우리 엄마의 허락 조건은 '에버랜드에 가도 좋으니 동생을 데리고 갈 것.'이었다. 나도 친구들과 우리끼리 재밌게 다녀오고 싶었는데 또 혹처럼 동생을 달고 가야 한다니 좋지만은 않았다. 고맙게도 친구들이 내 동생을 잘 챙겨주고 무사히 다녀왔다. 무엇을 하던 어디를 가던 동생과 세트로 다닌 기억은 이렇게 중학교 초반에서 끝난다. 이후론 동생도 제법 컸으니 각자의 길을 갔다. 


동생은 울기도 잘했고 내 눈엔 늘 어리숙하고 조금 모자라고 내 손이 가야 완성되는 아이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내가 고 3 때 동생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 동생이 공부에 재능이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됐다. 또래보다 체구도 작고 늘 눈물 빼며 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 1급 나, 너, 우리도 못써서 늘 내가 앉혀놓고 공부를 가르친 놈이었다. 동생은 중학교 3년 내내 성적이 우수했다고 했다. 동생이 공부를 곧 잘한다며 인근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동생을 우리 지역에 기숙사 딸린 고등학교에 입학시켜 달라고 했다. 입학만 하면 기숙사비와 3년 내내 장학금을 준다는 제안도 따라왔다. 충격이었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 3년간 성적이 하향 곡선을 그렸고 부모님이 바라던 대학에 갈 성적에 한참 미달이었다. 


내 형편없는 성적으로 어두웠던 집안 분위기가 동생 덕에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던 때였다. 난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해라,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대학 잘 가야 한다'라는 잔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랐는데 생각해 보니 동생에게 그런 잔소리가 오가는 것을 듣지 못했다. 잔소리를 해도 안 되는 애니까, 공부라는 것에 기대조차 없는 자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수험생이라는 핑계로 야자를 하고 늦게 오고 주말이면 하지도 않는 공부 핑계로 집 근처 독서실에 나가 있을 때 동생은 주방에 있는 식탁에서 책을 한상 펼쳐놓고 모르는 부분은 알 때까지 잠을 안자며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중학생 밖에 안된 녀석이 시험 기간에는 뜬 눈으로 버티며 시험 공부도 강도 높게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동생 시험 기간 동안 엄마도 잠들지 않고 동생 옆에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랬다. 동생은 바보가 아니었다. 뭐 하나 잘하는 게 없고 늘 약하고 어리숙해 보였던 애가 나에게 없던 공부 재능을 가진 애였다. 


동생은 그 재능에 성실함을 더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내가 해보지 못한 류의 효도를 했다. 더 이상 친구들한테 얻어터져 다니는 울보도 아니었고 대학교 재학 중에는 여기저기서 장학금도 받았더랬다. 엄마가 그랬다. 아들은 아르바이트 한 번 안 했어도 돈을 벌어다 주며 대학을 다녔다고. 나한테 들어간 대학 등록금을 꽤나 아까워하시는 눈치였다. 난 대학 생활의 꽃인 아르바이트도 제법 했는데 말이다. 물론 그 수입은 다 내 용돈과 술 값과 옷 값과...


코찔찔이 울보 내 동생이 서른 중반을 넘어선다. 본인 앞길도 알아서 개척해서 잘 살아내고 있는 듯하다. 더 이상 이 누나의 손길도 필요 없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 오히려 동생이 나를 걱정해야 한다면 모를까. 그리고 우리 남매는 이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로 생사를 확인한다. 휴대폰 수신자에 서로의 이름이 뜨면 "왜, 무슨 일이야, 왜 전화했어?"라는 말이 첫인사다. 전화가 오면 반가운 게 아니라 불안한 사이, 이것은 대체 무슨 사이라고 정의해야 하나 싶다.  


친한 친구의 생일은 캘린더 앱에 등록해 놓고 알람까지 확인해 가며 챙기는데 저장해놓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친동생의 생일에는 축하 인사를 건네어본 지 오래다. 어떻게 보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남매간에 서로의 골칫거리나 짐이 되지 않는 사이, 이것으로 우리 남매는 우애를 대신한다. ㅎㅎ 


이런 동생이 곧 결혼을 한다고 한다고 한다. 알아서 잘 커준 아들이 늘 고맙고 자랑스러웠던 엄마는 몇 년 전부터 결혼 이야기가 없는 아들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마다 엄마에게 "알아서 하겠지, 엄마! 뭘 결혼을 바라, 결혼해서 가장되면 그때부터 얼마나 힘든데, 당분간 그냥 충분히 놀라고 해. 결혼하면 집도 마련해야 하는데 집 값은 좀 비싸?"라며 되지도 않는 말들로 엄마의 걱정을 꺾으려 했다. 


이상하다. 난 진작에 결혼도 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도 있다. 그렇기에 난 행복하다고 주문을 외우고 정신 승리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왜 이런 류의 행복을 동생에게 바라지 않는 것인가 싶다. 내 동생이 남자다 보니 사회 통념상 동생이 지고 가야 하는 무게가 있을 것이라는 속 깊은 누나의 걱정에 동생 결혼을 서둘러 바라지 않는 것일까. 나의 속마음을 남편이 알면 얼마나 기가 차겠나 싶다. 그러는 본인은 어떻겠냐며, 처남은 결혼해 힘들까 걱정이 드는 그 논리는 뭐냐고 따져 물을 것 같다. 그래서 남편에겐 이런 마음은 굳이 내비치지 않기로 한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표현으로는 한참 부족한, 어쨌거나 세상에 하나뿐인 동생이다. 그리고 이 컨셉을 유지하기 위해 동생 결혼식 날 주책맞게 울지 않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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