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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케이 Jul 14. 2024

뉴욕 일기#3: 매일 진화하는 기분

살면서 삶이 이렇게 바빠본 적이 있나 싶다.

하루에 24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24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지난번 일기에서 첫 2주간 트레이닝이

많이 바빴다고 얘기했는데

3주 차가 끝난 지금 이 시점에서

첫 2주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이 든다.

지난주에 했던 말들은 모두 취소다 ㅎㅎ


한 주 동안 채권시장과 금리에 대해서 배웠는데

나의 한계를 맛봤다.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듣고

5시부터 더 이상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 오후 8-9시까지

회사에 남아서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집에 돌아와서 한숨 돌린 다음

눈이 감겨서 더 이상 못하겠다 싶을 때까지

그야말로 하루종일 공부를 했다.


살면서 하루종일 공부했던 날들은 충분히 많이 경험해 봤다.

그렇지만 정말 짧은 시간에 남들은 4년 동안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제대로 잘 알고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흡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건 처음이다.

마치 푸아그라를 만들기 위해 거위에게

음식을 강제로 먹이는 듯한,

꼭꼭 씹지도 못하고 그냥 무조건 빨리 삼켜야 하는

그러한 상황이었다.


대학 때는 수업이 끝나면 혼자만의 시간에 복습을 할 여유라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내가 앞에 것을 이해 못 했더라도 

뒤쳐진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그저 빠른 진도에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는 금융 전공이 아니라 

단어부터 시작해서 금융적인 표현 그 모든 게 

생소하게 느껴져서 분명히 난 영어를 이해하고

다 영어로 설명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해를 하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일주일이 다 지난 지금,

애널리스트 친구들과 어젯밤에 모여서

얘기를 하던 중에

어제 쳤던 시험 문제들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우리는 하루종일 같이 공부하니까

만나면 공부에 관련한 얘기가 대부분이다)

급하게 정보와 지식을 머릿속에 구겨 넣어서

내가 진짜로 이해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자신 있게 친구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정말 놀랐다.

지난주에 나에게 저 질문을 했으면 아무 말도 못 했을 텐데

그야말로 진화를 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열심히 공부를 해서 실력이 늘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내가 진짜 아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갈길이 멀구나, 정말 다 내려놓고 무조건 배운다는 마음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이 산업에서는

살아남기가 어렵겠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매일 바뀌는 시장과 세계정세 가운데서

이론으로 모든 걸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론이 어떻더라도 지금 당장 시장의 상황이 어떤지

호기심을 가지고 알아보려는 노력,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동시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들의 경제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흐름을 알 수 있고, 내가 생각하는 유리한 포지션을 성립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결국 세상에 대해서 얼마큼 호기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상황을 이해해 보고 정보들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을 만들려는 의식적을 노력을 해야지만

거기에 이론이 더해져서 통찰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노력을 하는 데 있어서

내가 얼마나 찾아보고 공부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에 다양한 분야에서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을 여럿 두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달았다.


지금 현재 내가 같이 공부하고 있는 애널리스트들은 총 81명이다.

 여기서 크게 세일즈, 트레이더, 리스크, 리서치로 나뉘고

여기서 또 신용, 주식, 부동산, 채권, 지수, 외환으로 분야가 나뉜다.

그리고 그 각 분야에서 맡고 있는 제품이 다 다르니

81명 중에 하는 일이 겹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아침에 뉴스에서 개발도상국에서의 석유 수입 수출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 부분에 대해서 나머지 81명보다 훨씬 상황을 잘 꿰고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정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과 마주 앉아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질문하면

내가 혼자서 파면 2-30분이 걸렸을 것을

5분의 대화로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애널리스트 트레이닝이 한 달 동안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한 달간 같이 고생하면서 서로 깊게 친해지고

서로가 뭘 하는지 잘 이해하는 시간을 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트레이닝이 끝나서 서로 다른 부서, 서로 다른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을 때

이 네트워크를 자원삼아 대부분의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는지

바로바로 떠오를 수 있게 말이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첫날부터 높으신 분들이 연설을 할 때 한분도 빠짐없이

'이제 시작하는 애널리스트들에게 딱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이 방에 있는 서로서로가 모두 정말 깊이 친해지고

강한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모두에게 큰 자산일 될 것이고,

한 달 동안 이것에 집중하면 좋겠다'

라고 하셨는데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알겠다.


이제 트레이닝이 총일주일이 남았다.

일주일 동안 공부가 쉽지 않을게 너무 뻔하지만

마지막이니까, 그리고 다들 같이 고생하니까

버틸 힘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

힘이 들어도, 잠을 못 자도, 모든 게 어려워도 그냥 즐겁다.

즐거워서 별생각 없이 잘 버티고 있나 보다.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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